<환대하는 삶-도로시 데이, 평화와 애덕의 83년> 로버트 콜스, 낮은산, 2010

<환대하는 삶>을 다 읽고 며칠이 지났다. 여전히 생각은 모아지지 않고, 어떤 말을 이 공백 속에 부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환대하는 삶>은 요약이 불가능한 책이고, 그건 저자인 로버트 콜스의 잘못이라기보다 그 책이 소개하고 있는 도로시 데이의 삶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일 테다. 위키피디아나 네이버 지식인 수준의 정리로는, 도로시 데이의 삶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뭔가 더 없나요? 뭔가 더 결정적이었던 건 없었나요?

처음, 이 책을 읽으며 기대했던 것은 말하자면 충분히 많은 것을 시도하고 결국 성취해낸 한 개인의 사상적, 실천적 분투기였다. 진보적 지식인 그룹의 일원으로, 명민한 여성작가로, 사회주의와 노동계급운동의 활동가로 인생의 전반부를 보낸 도로시 데이가 어떻게 그런 운동에 ‘투신’했다 멀어졌는지, 그녀가 세계대전과 대공황과 미국 민중주의의 발흥 속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무엇을 실천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모든 ‘관계’와 ‘정치 운동’에서 떨어져나가 ‘회심’한 가톨릭 활동가로서 인생의 나머지 후반부를 보내게 되었는지의 과정들이, 어느 정도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리라 기대했다.

'평범한' 전기였다면 내가 기대한 것들이 담겨 있었겠지. 그렇지만 <환대하는 삶>은 도로시 데이를 전기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이 책은 저자 로버트 콜스가 도로시 데이와 30여 년에 걸쳐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정신의학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을 감안하고 보면, 심지어 이 책은 그저 대화가 아니라 한 대상에 대해 끈질기게 수행된 '정신분석'의 결과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본인의 궁금증(혹은 더 깊게 도로시 데이에 닿으려는 탐구심이기도)에 답을 찾기 위해 콜스는 종종 집요하게 추궁한다. ‘회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결정적 한 방이 필요했으리라는 의심, 도로시 데이가 ‘환대의 집’을 꾸리며 겪었을 환멸과 자기부정, 그리고 그런 것을 내몰기 위해 어떤 정신적 기제들을 동원했을까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로, 콜스는 묻고 또 묻는다. 뭔가 더 없나요? 뭔가 더 결정적이었던 건 없었나요? 지금 말한 것들로 정말 충분히 다 설명될 수 있는 건가요?

하나의 책으로서 <환대하는 삶>을 요약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나의 단어는 분명하게 각인된다. 회심. <환대하는 삶>이 전기가 아닌 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사건-들의 연쇄 속에서 도로시 데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회심’만을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심'이라는 사건은 도로시 데이가 전반부의 삶에서 맺었던 많은 관계들에게 하나의 ‘퇴행’으로 보였을 것이다.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비타협적인, 심지어 종종 적대적이기까지 한 급진주의의 지적 전통 속에서 회심과 그에 따르는 영성의 삶은 ‘전향’ 그 이상으로 충격이었을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그 모든 실망과 질책과 비난과 의도된 무시들을 감수하면서, 회심자로 살았다.

사랑에 빠진 모든 여인처럼

그녀가 기꺼이 회심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회심이 “과거 관점으로부터의 극적인 전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긍정한 사고방식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과 예수의 설교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교회에 발을 들여 놓기 오래전에 지지했던 이상과 조화를 이루는 데” 있어 도로시 데이는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극적인 전환’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콜스의 추궁에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면박을 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의학자라면 가톨릭에 귀의한 일과 관련해서 내가 써놓은 글들에서 엄청난 걸 만들어 낼 수 있을 테죠. 정신의학자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어마어마한 걸 만들어 내니까요.” 정신의학자의 ‘어마어마한’ 발견 대신 그녀는 자신의 회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사랑을 했고, 달리 말하자면 사랑에 빠진 모든 여인처럼 나는 내 사랑과 일체가 되고 싶었다.”

사랑에 빠졌다, 고 그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일체가 되고 싶었다고 덧붙인다. 정신분석은 여기서 막힌다. 사랑으로 그리 되었다는, ‘회심’의 그 존재론적 순간을 정리하는 이 간단명료한 문장을 더 이상 어떻게 나누고 덧붙일 것인가. 물론 그녀는 안다. 자신이 귀의할 가톨릭이 어떤 곳인지를,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인용하는 로마노 과르디니의 충격적인 언급처럼, “교회는 그리스도가 매달린 십자가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표현대로 가톨릭 교회는 ‘거대하고 성공적인 기업, 국제적인 기업’이었다. 도로시 데이가 이런 지적에 위축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종종 그녀는 부러움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무신론자인 급진주의자 친구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데 비해, “가톨릭 신자인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부러움이라고 이야기한다. 부러웠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방식으로 싸웠다.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합니다.”

싸움의 방식, 환대하는 삶

▲ 도로시 데이
그녀가 사랑한 방식, 그녀가 싸운 방식, 그것은 ‘환대하는 삶’이었다. 오늘날도 ‘낮은 곳으로 기꺼이 임하는’ 교회와 믿음의 일꾼들은 도로시 데이의 이 말을 즐겨 인용한다. “저기 그분이 계십니다, 노숙자로 말입니다. 오늘날 과연 어떤 교회가 그분을 안으로 들여 먹이고 입히고 잠자리를 내드릴까요? 나는 내 생의 마지막 날 그 질문을 자신에게 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환대하는 삶이 쉽다고 이야기한다. 그건 돈이나 양심, 연민 이전의 문제였다. 그녀가 전해 들었던 한 스페인 촌부의 말. “한 사람을 위한 여분은 늘 있어. 모두가 조금만 덜 가지면 되니까.”

그래서 그녀는 ‘환대의 집’을 열었고, 그것을 늘려나갔다. 줄을 서서 배급을 받는 모멸의 순간들 대신 ‘환대의 집’에서는 누구나 기꺼이 들어와 음식을 받고, 비바람을 피하면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서로가 평등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대하는 삶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놓여야 할까? 도로시 데이가 보기에 그것은 교만 혹은 오만이었다. 내가 옳다, 내가 선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의 실천. 말하자면 ‘행세하는 태도.’ 그녀는 환대의 집을 찾아왔던 한 수녀님으로부터 배웠던 한 순간을 기억한다. 그 수녀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굉장한 유혹이에요.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거 말이에요.” 도로시 데이가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자 다시 한 번 수녀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자신의 발전을 도모할 때 그 위험성을 하느님은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들, 그분께 충실하고자 주방에서, 환대의 집에서 분투하고 있는 우리들은 스스로를 하느님이 인류에게 내리신 선물이라고 여길 위험을 안고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도로시 데이의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도 이어진다.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이들, 개인적 안녕을 버리고 보다 큰 대의를 위해 분투하고 있노라 여기고 있는 이들, 기꺼이 고난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하는 이들. 깨달음은 이 많은 이들에게도 함께 당도해야 한다.

‘도움이 되어 준다’는 게 무슨 뜻이죠?

‘환대의 집’에는 ‘환대하는 삶’을 배우고 실천하겠다며 찾아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남고, 어떤 이들은 떠난다. 남는 이들이 영웅인 것도 아니고, 떠나는 이들이 실패자인 것도 아니다. 저자 콜스는 환대의 집을 떠나간 한 청년이 보낸 편지를 길게 인용한다.

“그들이 말하는 ‘도움이 되어 준다’는 게 무슨 뜻이죠? 그 말의 뜻을 누가 정확히 규정할 수 있죠? 그들은 큰 정부는 민중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하고, 자선은 사람 대 사람 관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에게 실제로 벌어지는 일에서는 아주 멀찌감치 물러납니다. (…) 나는 그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을 뿐, 그들이 가진 생각 대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거대 기업과 싸우러 나서야 하고, 누군가는 정부를 압박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만들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일하는 사람을 옹호해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워싱턴에는,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는 등 돌린 채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는 건 바보 같은 일입니다. 젠장, 제 입장은 그렇다는 말입니다. (…) 이런 식으로 말하기는 싫지만, 누군가는 가혹한 현실을 끈질기게 따라잡으면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발언해야 합니다. 성경 구절이나 당신네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그 소설들에 나오는 구절들 암송이나 계속하고 있지만 말고.”

나는 이 긴 인용이 이 책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젠장’이라고 투덜대며 ‘당신네’들에 대해 비아냥대지만, 이 청년의 문제의식은 분명, 정당하다. 도로시 데이 역시 공감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하나의 ‘물음’으로 작동할 것이다. 물론 도로시 데이는 냉소적인 반응으로 멈칫 물러나기도 한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에 대한 해결을 강조하는 청년들이 “개별적인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고, 오직 그 모든 숫자와 비율만 생각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다는 것이다.

잠깐의 그 냉소를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사랑은 실패하는 순간들이 더 많은 것이다.(누구보다 도로시 데이 자신이 그 실패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냉소를 극복하는 방식은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환대하는 삶’의 방식을 지금 지탱하고 존재해야 하는 이유 자체에 대한 해명. 미래로 이어지는 ‘환대하는 삶’에 대한 선언.

“우리의 삶은 수세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맞닿아 있기에,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수세기가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 세상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이 뭔가 중요한 의미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듯, 그건 ‘존재의 사슬’이고 나는 우리 일이 그 사슬에서 우리의 작은 조각을 지탱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일종의 지역주의이고, 일종의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슬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연결되어 있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거지요.”

이렇게 생각해 본다. ‘환대하는 삶’처럼 보이기는 쉬울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칭송되는 많은 미덕들이 이미 그런 삶들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환대하는 삶’으로 사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저 앞의 청년과 같은 고민을 갖고 있기도 하고, 헌신하는 삶인 척 하는 ‘행세하는 태도’로 오만과 교만을 일삼는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는 ‘환대하는 삶’이 결국 ‘증인’으로서의 삶이라고 이야기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선전 선동에 참여하는 데 있지 않고, 심지어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살아있는 신비’가 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이 실존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삶이 의미를 갖지 못하리라는 태도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비가 없다면, 삶의 의미가 없다는 태도.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증인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 ‘환대하는 삶’은 그런 긍정 속에서만 가능할 테다. 회심, 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 단정하는 무신론자에게도 이 긍정은, ‘환대하는 삶’은 신비롭다. 어쩌면 <환대하는 삶>을 읽는 동안의 내게는 도로시 데이가 ‘그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불충하대도, 그렇게 믿어 본다.

진용주/ 도서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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