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원의 미래를 걱정하며

▲ 선우경식 원장은 피곤할 때면 늘 옥상에 올라와 있기를 좋아했다. 붉은 꽃이 생기에 넘친다.(사진/한상봉 기자)

가톨릭 신자로서 내 신앙의 비망록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요셉의원 창설자인 고 선우경식 전 요셉의원 원장과 현 요셉의원원장인 이문주 신부다. 가톨릭 교회에서 두 분에 대한 평판과 입지 만큼이나 두 분이 내게 던진 감동과 충격 역시 크다. 한 분은 빛으로 유감스럽게도 또 한 분은 어둠으로...

2000년 4월, 필리핀의 빈민의료봉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국내의 새로운 봉사지를 찾고 있었다. 우연히도 한 일간지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노숙인을 위한 자선의원 ‘요셉의원’과 의사 선우경식이었다. ‘바로 여기다!’ 그날 나는 단숨에 영등포로 달려갔다.

“저는 선우경식이라고 합니다.우리병원에서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요...” 선우경식원장과의 첫 만남이다. 그는 새로 온 봉사자에게 자리를 권하고 주방에 들어가 손수 차와 빵 한 조각에 담아 내어주며 환영했다. “우리병원은 평범한 봉사자들이 모여 좌충우돌하며 가는 자선병원입니다.그래서 오합지졸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대로 요셉의원은 오합지졸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일사불란한 조직과 잘 짜인 제도가 큰성과를 낸다는 내 믿음에 직격탄을 날렸다. 한심했다. 그러나 요셉의원이라는 뚜껑을 열고 들어간 그날 이후 지난 10년동안 내 삶의 발목을 붙잡고 투신하게 만든 오합지졸의 매력은 제도와 조직이 아닌 ‘정신’이었다.

▲ 선우경식 요셉의원 전 원장
어느해인가 몸서리 치는 혹한을 뚫고 배낭에 무언가를 잔뜩 넣은 30대의 한 노숙인이 선우경식을 찾아왔다. 선우경식은 노숙인을 데리고 약제실로 왔다. 배낭을 열자 출처미상의 주사약들이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노숙인은 십만원을 받아갔다. 그렇게 노숙인과 선우경식의 거래(?)는 쭈욱 계속되었고 약제실 창고엔 노숙인이 쏟아놓은 쓸데없는 약들이 쌓여갔다.

약사로서 ‘출처미상’과 ‘사용불가‘의 약이니 ’속지말라‘는 내 주장과 노숙인에 대해 냉정한 처신을 요구하는 봉사자들의 빗발치는 성토에도 불구하고 노숙인이 배낭 한 가득 약을 가지고 올때마다 선우경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십만원을 꼬박꼬박 주었다. 참다못해 제동을 건 것은 나였다. ’더 이상 속아 줄수 없으니 그만 오라‘ 는 강력한 경고 후 노숙인은 발길을 끊었다.

2009년 4월 19일 나는 그 노숙인을 다시 만났다. 선우경식 원장의 빈소였다. 이제는 노숙인이 아닌 어엿한 사회인이었다. “말없이 받아주신 그분을 잊을수가 없어요. 제가 무슨 수로 종잣돈을 마련하겠어요? 덕택에 이렇게 일어섰어요” 그는 요셉의원에 진 빚 삼백만원을 선우경식의 영전에 바쳤다.

선우경식은 처방전에 약, 주사보다는 ‘밥’‘외투’‘용돈’을 자주 썼다. 노숙인의 질병 속에서 그들의 ‘현실’과 ‘삶’을 읽기 때문이다. 제도와 조직과 규칙이 놓치는 한 사람 안에 숨어있는 삶과 연대하기 위해 그는 ‘정신’ 구체적으로는 ‘복음정신’으로 요셉의원을 움직이려고 발버둥쳤다. 제도와 조직의 그물망이 놓치는 ‘나머지들’ 정부와 사회와 종교가 외면하는 ‘맨 밑바닥’ 세상 어디에도 호소할데 없는 오도갈데 없는 노숙인을 ‘꽃봉오리 같은 나의 환자’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2009년 4월18일 선우경식은 위암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동안 독신과 가난이라는 개인적인 희생으로 일군 요셉의원과 노숙인을 유산으로 남긴 채. 그의 죽음과 함께 요셉의원도 변화를 겪었다. 선우경식을 존경하고 따르던 직원, 봉사자들, 노숙인 환자들이 요셉의원을 떠나는 것이었다. 지금 요셉의원 안에는 선우경식을 기억하고 그가 무슨일을 했으며 왜 했는지 그의 가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의심스럽다. 그가 떠난 자리를 고귀한 ‘정신’ 대신 제도와 조직이, ‘봉사자’의 자리에 성직자의 권위가 요셉의원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떠나지만 그가 남긴 유산과 유업은 남은 자의 몫이다. 선우경식이 남긴 복음적, 사회적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하고 완성시키는 것이 요셉의원의 몫이라고 믿는다.

▲ 요셉의원 옥상에 오르면, 쪽방촌이 한눈에 들어온다(사진/한상봉 기자)

선우경식이 요셉의원을 통해 내게 던진 화두는 ‘세상’이라면 후임자인 현 요셉의원 원장인 이문주 신부가 내게 던진 질문은 ‘교회’다. 선우경식이 남긴 미완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문주신부는 적어도 ‘해답’을 줄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이라는 정답을 가진 노련한 원로사제이고 복음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법과 교회의 권위를 최고법으로 내세우고 명령, 관리, 통제를 통한 신부의 독선은 요셉의원이 선 삶의 자리, 즉 노숙인의 현실과 그들의 처지, 그들의 요구에 귀를 막고 오랜 시간동안 요셉의원에서 봉사해온 봉사자, 직원들과의 소통과 대화를 단절케 했다. 창설자인 선우경식이 20년에 걸쳐 요셉의원을 움직인 2개의 축, ‘노숙인’과 ‘의료기관’이라는 요셉의원이라는 공동체적 열쇠를 배우고 체험하기 전에 자신의 계획과 꿈을 성급하게 심으려고 한 신부님의 무리수는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거쳐 선우경식을 따르는 사람들이 요셉의원을 떠나는 것으로 끝났다.

지난 2년동안 요셉의원 안에서 직원과 봉사자들은 이문주 신부와 대화, 설득이라는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쳤다. 입장과 생각이 다른 위기상황을 만날때마다 이문주신부는 ‘교회법’과 사제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일방통행의 집행을 했다. 교회와 사제라는 종교권력 앞에서 상식도 법도 무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력감과 분노로 지쳐갔다. 그리고 호소했다. 봉사자 선우경식의 유족이 추기경에게 가톨릭 사회복지회에 요셉의원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호소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다. 돌아오는 것은 침묵 혹은 무시, 경고였다. ‘감히 신부에게 대든다’‘신부의 뜻은 하느님의 뜻이다’‘포기해라’였다.

2009년 12월,선우경식에게는 자식이나 다름없는 노숙인 자활터 공동체인 '요셉의 집'에 사는 노숙인들이 자활터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나는 이문주 신부가 선우경식의 유지를 따를 의지가 없음을 최종 확인했다. 내게 요셉의원은 집이고 교회였다. 아니 그 이상이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보게 해준 곳이었다. 이곳의 낮은 문턱을 들어오면 못난 놈 없는 놈 실패한 놈들이 큰 소리치고 기세등등하고 잘난 놈 출세한 놈들이 부끄러워하고 미안해 하며 회개의 기적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부귀영화가 얼마나 천박한 정신이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악마의 유혹이라는 진실을 나는 선우경식의 행동과 실천을 요셉의원에서 배우고 익혔다.

나는 요셉의원을 떠남으로써 새로운 요셉의원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분노와 실망과 슬픔과 그리움으로 요셉의원에 남아있는 분들, 선우경식을 생각한다. 지난 10년동안 요셉의원은 선우경식과 이문주신부, 두 분을 나에게 선물했다. 두 분을 통해 나는 ‘세상’과 ‘교회’를 배웠다. 교회의 무기는 ‘정신’ 즉 신앙의 말로하면 ‘영성’이라야 한다는 것, 이 무기가 갖춰지지 않은 지도자나 성직자가 쉽게 사용하는 유혹이 종교적 ‘권력’이라는 교훈이다. 그리고 교회가 사용하는 유혹때문에 상처받고 우는 ‘세상’이 있음을.

지금 요셉의원을 지키는 이문주신부에게 본 회퍼 목사님의 말씀으로 떠난자의 심정을 대신한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는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2000년 4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요셉의원에서 상근 봉사자로 일해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