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소설-23] 동행-유다와 예수

▲ 동행-유다와 예수
폭염 속에서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사해에서 가져온 붉은 흙을 물에 개어 발라주었다. 처음엔 사람들이 쓰리다고 고통스러워했지만 두어 시각이 지나면 금방 괜찮아졌다. 흙을 바른 후 하루나 이틀정도 기다렸다가 요르단 강에 내려가 피부에 굳은 흙을 물에 불려서 닦아냈다. 이렇게 두세 차례쯤 계속하면 곪은 상처 부위가 고들고들해 지면서 새살이 차올라 대부분 금방 회복되기 시작했다.

카루라와 그이는 피부병과 염증 치료를 좀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증상에 따라 몇 가지 약초들을 우려낸 물에 붉은 흙을 개어 사용하기도 했다. 요한이 자리를 비운 기간에도 요르단 강으로 사람들이 연일 몰려들어 요한을 찾았다. 유대 땅의 모든 시선들이 이곳 요르단 강의 요한에게 집중했다.

한 아낙이 천으로 눈을 가린 어린 딸의 손을 이끌고 숲속을 찾아왔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카루라와 그이를 찾았다. 마침 카루라는 환자들의 치료에 필요한 향료를 구하러 예리고에 나가서 자리를 비운 참이라 안드레아가 그이 혼자만을 데리고 왔다. 안드레아가 그 아낙에게 말했다.
‘염려 말라구. 여기 이 분이 당신의 어린 딸 눈을 번쩍 뜨게 만들어 줄테니’

그이가 안드레아에게 괜히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말을 삼가라고 눈짓으로 나무랬다. 아낙이 말했다. 딸이 태어나서 여덟 살 되던 해에 눈이 붓고 진물과 눈꼽이 심하게 끼더니 아침이면 그 눈꼽이 굳어서 눈을 뜨기 힘들게 되고, 눈을 뜨려고 눈꼽을 떼는 고통이 심해선지 점차 눈 뜨는 것을 포기하더니 이젠 아예 눈을 뜰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지가 벌써 5년이 넘었습니다.

그이가 어린 딸의 눈에 묶은 천을 풀었다. 양쪽 눈에 딱딱한 고름이 켜켜이 굳어 있고 눈꺼풀은 짓물러 있었다. 카루라는 사흘 후쯤에나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카루라가 없으니 어쩐지 자신감이 서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 그이에게 소녀가 말했다. 분명히 당신은 저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겁니다.

그이가 소녀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렇게 믿느냐. 내가 치료해 주는 것보다 너의 믿음이 병을 물리칠 것이다. 그이가 손바닥으로 소녀의 눈을 가렸다가 떼었다가를 반복했다. 무엇이 보이느냐. 예, 희미하게 훤해졌다가 다시 캄캄해졌다가 합니다. 그렇다면 너의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시 볼 수 있겠다. 여기 마음씨 좋은 안드레아가 예쁜 너의 얼굴을 맑은 물에 담그게 하여 굳은 눈곱과 고름을 물에 불려서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 낸 다음에 내게 다시 데려올 것이다.

한참 후에 안드레아가 낭패한 표정으로 소녀를 그이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왔다. 그이가 그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굳은 눈꼽을 씻어 내면서 짓무른 눈꺼풀에 상처가 패여 피고름이 쏟아졌다. 소녀는 고통을 참으려고 눈을 꼭 닫고 혀를 깨물고 있었다. 그이는 약초를 우려낸 물에 붉은 흙을 개서 소녀의 눈에 조심스럽게 발라주고 다시 흰천으로 눈을 감아 묶어 주었다. 지금 눈이 쓰려서 아프더라도 너는 잘 참아낼 것이다. 내일 하루 동안 풀지 말고 그대로 두면 모레 아침에 네가 머무르고 있는 움막으로 내가 갈 것이다.

이틀 뒤 아침에 그이는 모녀가 들어있는 움막으로 찾아갔다. 소녀의 손을 꼭 쥐고 요르단 강으로 내려갔다. 소녀가 더듬거리며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염려마라. 나와 함께 걸어가면 너는 절대 넘어지지 않는다. 저 앞에 강이 흐르고 있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느냐. 소녀가 금방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으니 강이 노래를 부릅니다. 눈 뜬 사람조차 들을 수 없는 것을 너는 듣고 있구나. 그래 이 강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으냐.

소녀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흰천으로 묶어진 눈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집중했다. 예, 강물은 흰색과 검은색이 서로 뒤섞여 흐르면서 온갖 빛깔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파란색과 노란색 사이에 예쁜 붉은 색이 뛰어 놀고 그 속엔 연두색이 반짝이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 너의 말이 맞다. 이미 너는 강을 보고 있다. 네 눈은 곧 뜨게 될 것이다.

강가에 이르러 얕은 물로 발걸음을 옮길 때 소녀가 다시 주춤했다. 내가 너의 손을 꼭 잡고 있으니 염려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는 한 강물보다 더 깊고 넓은 바다 위라도 걸을 수 있다. 소녀가 안심이 되는지 그이의 손을 꼭 쥐고 물속으로 들어왔다. 자 이제 눈에 묶은 천을 풀고 얼굴을 강물에 담구어라. 이 요르단강의 흐르는 물이 너의 눈에 붙여두었던 흙을 자연스럽게 씻겨 줄 것이다. 오늘 요르단강은 너를 위해서 흐르고 있다. 그녀의 눈에서 붉은 흙이 씻겨지자 눈두렁의 부기도 많이 빠졌고 고름도 거의 멈추었고 눈꺼풀엔 피딱지가 곱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 다시 붉은 흙을 개어 발라주고 천으로 묶었다. 또 이틀 후에 이곳에서 만나자. 이제 너는 움막에서 이곳까지 혼자서도 걸어 올 수 있을 것이다.

그이는 이틀 후 아침에 강가로 나갔다. 벌써 그녀가 강가 작은 바위 위에 앉아서 그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을 발라서 단정하게 빗어 넘긴 그녀의 검은 머리가 아침 햇빛에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녀는 눈을 묶은 천을 풀고 강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얼굴을 담구어 눈에 발라둔 붉은 흙을 흐르는 강물에 씻었다. 눈의 상처가 많이 아물었다. 이제 고름은 멈추었지만 요 며칠 새 흐른 눈꼽만 굳은 채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이가 소녀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이것을 부드러운 천으로 닦으면 짓물러진 눈꺼풀 주변에 또 상처가 덧날 것이다. 그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소녀를 무릎에 뉜 다음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밑 침샘을 꾹 눌렀다. 혀뿌리에 침이 가득 고이자 소녀의 눈에 굳어있는 눈꼽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짭쪼름 하면서 눅눅한 냄새가 혀끝을 통해 전달되었다. 뒤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서로 수근 거렸다. 그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옆에서 그이를 지켜보던 카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고개를 든 예수가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아직 눈을 뜨지 마라. 억지로 눈을 떠서 세상을 보면 너의 눈도 상처를 입고, 너의 눈빛이 닿는 세상도 상처를 받는다’

바로 옆에서 카루라가 정성스럽게 개어준 붉은 흙을 다시 소녀의 눈에 곱게 펴서 바르고 천으로 묶었다.
‘이제 다 나았다. 내일 날이 저물면 여기 강물에 몸을 담그고 눈에 바른 흙이 흐르는 물에 자연스럽게 모두 씻겨 지도록 기다려라.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떠서 제일 먼저 밤하늘을 보거라. 훤한 낮에 첫 눈을 뜨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너무 소리를 크게 질러대어 너의 눈이 상할 수 있으므로 꼭 어둑해지는 저녁참에 그렇게 하도록 해라’

▲ "감긴 눈, 뜬 눈"(그림/홍성담)

다음날 저녁식사 후, 아파스 바위 뒤편에서 동료들이 몇 가지 사안을 두고 논의하고 있었다. 요한이 벌써 두 주째 자리를 빈 까닭에 숲 속의 세례 공동체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하나 둘 드러났다. 들뜬 얼굴을 한 안드레아가 소녀를 데리고 그곳에 왔다.
‘저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누구예요’
유다가 소녀를 반기면서 말했다.
‘이제 너의 눈으로 볼 수 있으니 네가 직접 그분을 찾아보아라’

소녀가 요한의 제자들을 쭉 둘러보더니 그이를 향해 걸어왔다.
‘당신입니다’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지 못한 안드레아가 맞장구를 쳤다.
‘맞다. 그이가 너의 눈을 뜨게 했다’
그이는 소녀가 내미는 작은 손을 꼭 쥐었다.
‘눈을 뜨고도 못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너는 그동안 감긴 눈으로도 세상을 이미 보고 있었다’
‘바로 당신이군요. 저의 눈을 뜨게 만들어주신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니다. 너의 감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있다. 너를 이곳에 데리고 온 너의 어머님께, 그리고 치료약을 만들어 준 저기 카루라에게, 너의 뒤에 서있는 안드레아에게 먼저 감사해라. 그리고 너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만들어주신 그 분께 감사해라’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너의 눈이 세상을 볼 수 있으니, 지금 가장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예, 새롭게 뜬 저의 눈으로도 볼 수 없는 것들을 이제 보고 싶어요. 제가 긴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을 때 세상엔 제가 보지 못한 것들이 가득했듯이, 이젠 이 뜬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가득 할 겁니다’
‘그렇다. 너는 그것들을 결코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어머니와 함께 움막으로 가서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여라’

안드레아 뒤에 서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를 했다. 어머니의 손을 쥐고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소녀가 뒤돌아 큰소리로 말했다.
‘저의 이름은 베로니카예요. 기억해 두세요. 그리고 혹시 예루살렘에 들리시거든 미쉬네 동네에 사는 저를 꼭 찾아주세요’
그들이 어둠속으로 멀리 사라지자 카루라가 예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자네는 어쩔 수 없는 무당이네. 무당이라구. 마술은 자네가 다 부리고 있네. 자네는 이 짓을 타고 태어났다구’
그이는 라자로의 죽음이 준 충격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이를 바라보는 유다의 얼굴에 비로소 안심하는 빛이 가득했다. 유다 옆에서 그이를 지켜보던 요하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이죽거렸다. 유다는 요하임의 그런 표정을 단지 느낌으로 읽고 있었다.

<계속>

홍성담
/ 안토니오, 화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