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한상욱]

희망이 없는 사회라고 말한다. 절망은 희망의 반대말이다. 절망은 인간이 하느님과 단절할 때 나타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다. 그런데 인간은 그 희망을 받지 않고 절망에 빠졌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거미형’ ‘개미형’ ‘나비형’이다. 각각의 상징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제도와 가치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미는 거미줄을 멀리까지 뻗친다. 자신이 정한 구역 내에 먹이가 들어오면 날름 삼켜 버린다. 먹잇감은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 거미는 처음에 거미줄을 만들기 위해 일하지만 그 후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먹잇감이 알아서 찾아오기 때문이다. 먹이는 살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미궁에 빠질 뿐이다.

냉혹한 자본 중심의 체제와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 거미는 유사한 점이 많다. 며칠 전 유명대학들이 전국적으로 땅 투기를 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명분이야 그럴싸하게 제2, 제3 캠퍼스라고 하지만 본심은 그렇지 않다. 당연히 부동산 이익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투기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학생들이 낸 돈으로 부동산을 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학벌이라는 그물망을 만들어 수십만 학생들에게 ‘거짓신화’를 조장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성공이 보장 된다’라고... 재단은 재벌이 차지하고 대학을 기업으로 만들고 교수는 채용하지 않고 비정규직 강사들만 늘어나고 학생들에게 고액의 등록금을 받아서 땅 투기하고 지식을 팔아먹는 이들이 거미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개미는 열심히 일한다.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한다. 겨울에 먹을 식량을 땅속 밑에 곳간을 파고 저장해 둔다. 그런데 개미는 그 기쁨을 알지 못한다. 노동하는 것이 힘들고 귀한 사람처럼 대접받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미의 미래는 거미처럼 사는 것이다.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 개미의 삶이 중심이 아니라 거미처럼 타인의 고통을 미끼로 산다면 그것은 개미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다. 수많은 개미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왜곡과 반칙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거미들의 왕국으로 편입하기 위해 사람들은 애쓰고 산다. 우리 사회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병역기피, 위장전입, 탈세, 부동산투기,논문표절 등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칙과 부정이 있어도 거미들은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그래서 ‘거미왕국’이 우리 사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정한 거미보다 정직한 개미가 낫다.

마지막으로 ‘나비형’이다. 나비는 정주하지 않는다. 나비도 날기 위해 개미처럼 쉬지 않는다. 적어도 나비와 개미는 타인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는다. 남을 속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나비는 항상 날아 다녀야 하니 쌓아둘 곳도 없고 쌓아둘 수도 없다. 그런데 자유롭다. 멀리 멀리 갈 수 있다. 사람이 나비처럼 살 수 없다. 그래서 나비는 이상형이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삶이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한곳에 머물지 않으니 많은 꽂들을 만나 희망을 나누어 줄 수 있다. .

거미와 개미와 나비의 공통점이 있다. 같은 생명이니까 모두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것인가?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각자의 삶에 담겨져 있다. 적어도 거미는 되지 말아야지, 개미로 살아도 거미를 부러워 할 것은 없다. 단지 개미와 나비처럼 열심히 일하고 나비를 이상으로 안주하지 말고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 다니며 살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비인가? 개미인가? 거미인가?

한상욱 / 인천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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