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검은 점처럼 내 가슴 복판에 딱 박혀있어"
-안동의료원에 입원 중..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책 펴내

안동교구 류강하 베드로 신부(71세)가 5년 여의 아프리카 선교활동을 마치고 안동으로 돌아와 생활해 오다, 최근 들어 폐 조직이 굳어가는 ‘특발성 폐섬유화증’이라는 병을 얻어 안동의료원에서 투병중에 있다.

정부의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생명평화미사가 권혁주 주교의 주례로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되는 날, 몹시 비가 내리는데, 안동의료원 205호로 류강하 신부를 방문했다. 호흡곤란으로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는 류강하 신부는 10분 이상 면회를 하기 어렵다고 했다.   

▲ 류강하 신부는 방문한 기자들에게 책을 한 권씩 나누어 주었다. 당신이 '지금 행복'한데, 다른 이들도 모두 '행복했음 좋겠다'고 말한다.(사진/정현진 기자)

여전히 기억력이 밝은 류강하 신부는 대뜸 기자를 알아보며, 최근에 출간한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라는 책 제목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병실에 누워 있으니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병중에서도 류 신부는 궁금한 것이 많다고 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2개의 정부(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지나갔고, 그동안 많은 사제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다시 옛날로 복귀했다"면서, 지금 사제들은 "예전의 그 시간들을 지금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 했다. "어떻게 생각해?"하고 물었다.

이어 류 신부는 "신부들이 권력 주변에서 맴돌다가 권력 핵심부에도 가까이 있어봤고, 그런 분들은 지금 지난 권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지금 권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보고 싶고 그래. 나는 (권력을 쫒는다는 점에서) 똑같다고 생각해.. 참...어렵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류강하 신부는 "(사제들은) 끝까지 가면 안돼, 끝까지 가면 안돼..."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문정현 신부가 새만금에서 김대중과 생각이 많이 다른 것을 느꼈다고 했다는데, 그랬을 거야. 정치인들은 우리랑 달라"하면서, 정치인들의 생리를 사제들이 닮아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정치는 정치, 종교는 종교"라는 것이다. "(사제들은) 다만 도덕성,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성에 파수꾼 역할을 하면 좋은데, 쉽지 않지."하고 말을 어렵게 이어갔다.  

사제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삼성비리 사건과 용산참사를 들어 거론했다. 

"사제단이 김용철 변호사와 한 건 했는데, 어떻게 봐, 그거? 잘했다, 잘못했다는 것 보다도... 약자 편에서 일하는 것은 좋은데 전체적인 설득력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 것 같아. 용산문제 해결은 참 잘한 것 같아. 용산은 사제가 아니면 해결될 수 없다고 나는 믿어. 그 어려운 사람들, 사제 몫이었어. 개신교에서 얼마나 했는지 잘 모르지만, 사제가 해결했다고 생각해, 안그런가?"

류강하 신부는 "그래도 사제단이 한 시대의 양심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다만 상황이 많이 달라진 지금 사제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고 있을 뿐이다.  

▲말씀에 사진을 찍으려하자, 류강하 신부를 곁에서 지켜주고 있는 자매님이 사진'발' 좋으라고 산소호흡기를 떼어주었다. 류강하 신부는 환한 미소로 답해주었다.(사진/정현진 기자)

▲ 류강하 신부는 "어렵지?" 하며, 기자에게도 한 마디 해달라는 부탁에 "그래도 제 갈 길 가야지, 주님 안에서." 하셨다.(사진/정현진 기자)

이야기를 돌려, 아프리카 선교활동을 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가난. 가난은 검은 점처럼 내 가슴 복판에 딱 박혀있어. 그 사람들 하얀 두 눈, 하얀 이, 내 가슴에 너무 깊이 박혔어."

그리곤 대뜸 "문규현 신부 안좋다더니 괜찮은가?" 물었다. 기자는 "좀 나아지신 것 같아요. 요즘 같이 삼보일배 했던 수경스님이 다 버리고 떠나셔서... 요즘 미사만 하시고, 좀 떠도시는 것 같아요. 몸보다 마음이 안 좋으시죠." 했더니, "신부는 (본당을) 못 떠나는구만... 미사도 해야 하고. 그래, 그 스님 어디 갔노?"하고 물었다.  

▲ 류강하 신부가 쇠똥으로 지은 집에 살고 있는 마사이족을 만나고 있다.(사진출처/<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류강하, 햇빛 출판사)

1993년 이후 안동상지전문대학에서 학장으로 재직하며 '가정 같은 학교, 어버이 같은 교수'가 되자는 철학으로, "학생이 소중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대학", "대학 모든 구성원이 행복을 느끼는 대학"을 만들고 싶어했던 류강하 신부는 2004년 7월 22일 아프리카의 케냐로 떠났다. 나이로비에서 2009년까지 아프리카 원주민들과 지냈다. 그가 나이로비에서 첫미사를 드릴 때, 춤추며 부르는 환상적인 성가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때 그가 한 말은 이렇다. "이들은 돈만 없을뿐 다 받았구나!"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모두 받았으나, 결정적으로 너무 가난했다. 물도 부족하고, 의료시설과 약품도 부족하고, 인종갈등이 심하고, 정부는 무능했다.

아이들은 "짐승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방치된 채 자라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성무일도의 마지막 기도에 "주여, 오늘도 어려운 일을 만나는 형제에게 도움을 ..."이라는 구절에 눈이 머물러 가슴이 먹먹해졌다. 

▲ 류강하 신부는 1969년 목성동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동료들과 두봉 주교.
류강하 신부는 처음 신학교에 들어갈 때 대구교구 소속이었다. 그는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라는 책에서 당시 대구 교구장이던 서정길 주교를 벌벌 떨며 면담하던 신학생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1969년 안동교구가 설정되어 초대교구장으로 두봉 주교가 오자, 그분을 모시고 사제품을 받고 사목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다. 

두봉 주교는 1970년대 류강하 신부가 의성성당에 있을 때 사목방문을 와서 구태어 싸늘하고 비좁은 사제관에서 새우잠을 함께 자던 기억을 떠올리며, 사제의 모범으로 삼았다. "빡세게 기도하시는 분"이며 동시에 현실참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분이었다. 오원춘 사건을 비롯해 고초를 겪으면서도 늘 사제들과 함께 했다. 류강하 신부도 그처럼 가톨릭농민회와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청춘을 바쳤다.

이 류강하 신부가 안동교구 의성성당, 목성동성당, 영주성당, 다인성당, 서문동성당을 거쳐 상지대 학장으로 사제생활을 마감하고 은퇴 후에 안동교구보다 더 척박한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아프리카의 삶을 되돌아 보면 감사와 배움이 있었다. 뭘 배웠나? 가난의 덕?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옆에서 구경만 하면서 그들의 고달픔과 슬픔을 마치 내가 그런 속에서 견디며 사는 것처럼 이야기한 것은 아닌가 반성도 한다.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화장해서 더 많은 동정을 이끌어내려 하지는 않았던가? 가난한 사람을 이용한 그 무엇?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아니 그런 능력도 없으면서 그 가난을 미화한 것은 아닌가? 양심의 가책으로 가슴이 싸하다"

▲ 류강하 신부, <당신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햇빛출판사
그는 아프리카에서 그들과 충분히 함께 하지 못하면서 옆에서 고민만 잔뜩 하며 지낸 것 같다고 말한다. 녹슨 함석집에 사는 소소, 대책없이 살아가는 에이즈 환자 잔네트, 겨우 장사밑천이라면서 그들에게 준 도움조차 부끄럽다고 말한다. 사제생활을 닫으면서, 따뜻한 배려와 우정을 나누어진 교우들에게 감사하며, 그는 예레미아 예언자에게 내린 이 한 마디를 기억하고 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
내가 너와 함게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 1,5-8)

한편 류강하 신부는 지난 5월 15일 5대 총장으로 2004년까지 재임했던 상지대학에 "상기 금액은 본인이 학교 재직시 받은 수당 일부를 내핍하여 절약한 자원입니다. 귀교에 가난한 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 드립니다"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4천만 원을 기탁했다. 상지대학은 장학위원회를 소집해 류 신부가 기탁한 장학금을 기탁자의 뜻에 따라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선발, 장학금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