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안은초]

백수생활 5개월. 4월 검정고시에 합격하자마자 다니던 비인가 학교를 끊고 눈 깜짝할 사이에 9월이 되었다. 그 5개월의 대부분은 다 느긋하고 평화롭게 흘러가는 하루하루…… 워낙 평화롭게 사는데다, 내 속까지 편한 성격이라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정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화가 나는 경우가 분명히 있으니…… 오늘도 그 때문에 친구에게 정색하고 화를 내 친구를 당황하게 만들어 버렸다. 친구여 아무것도 모르는 너에게 버럭 화를 낸 못난 나를 용서하시게……

하필이면 많고 많은 것 중에 내가 화를 낼만한 것만 골라서 찔러댔던 친구는 운이 안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감히 잠자는 백수 왕 사자의 코털을 건들이다니. 뭐, 그냥 한번 찔러본다는 게 우연히 코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사자는 남의 사정까지 신경써 주지는 않으니까…… 결과적으로 건드린 사람이 운이 좋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자를 건드린 인간 쪽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딱히 쓸 만한 소재도 없는데 잘됐다 싶어 내가 화를 내는 이유들을 좀 변명해 보고자 한다.

내가 화를 내는 첫 번째 질문.
“너 대안학교 다녔다며? 너 좀 놀았나보다?”

뭐 사실 이 정도로 쉽게 화를 낼 정도로 내공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다. 그 시점에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그 정도의 질문으로 화를 내진 않는다. 다만 상대가 다소 지칠 정도의 긴 설명을 해댈 뿐.

대충 정리하자면 치유형 대안학교와 자유형 대안학교의 차이점, 내가 다녔던 학교의 유형, 그리고 앞으로 다니고자 하는 학교의 유형과 대안학교를 선택한 이유까지…… 이래도 상대가 납득하지 않는다면 그냥 가만히 두는 편이다. ‘너와 나의 길이 다른가보다’ 하는 해탈의 경지를 가지고서.

그리고 조금 화나는 두 번째 질문.
“쟤가 왜 네 가족이야? 피 섞였어?”

물론 질문을 한 쪽은 우리 집이 그룹 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친절히 설명해 줄 생각도 전혀 없다. 나야 말을 해도 별로 상관없지만, 당사자인 그룹 홈 가족이 신경 쓸 때가 가끔 있기 때문에 말을 해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이야 노련하게 “친척이야.”하고 말지만, 어렸을 때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왜 가족이며, 어떤 가족이며, 피가 섞였는지 안 섞였는지 왜 같이 사는지 까지 다 설명해 주어도 이해를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피가 섞이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라는 개똥철학을 가진 친구들이 의외로 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몰랐으니까 패스. 여기서 화내면 오히려 저 쪽에서 더 황당해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과 놀림이 바로 이것.
“자퇴생이라고? 이거 양아치구먼?!” 혹은 “너 자퇴한 게 아니고 퇴학당한 거지?”

장난인 줄은 알지만 역시 싫은 건 싫을 수밖에…… 아무리 그 쪽은 장난이라 할지라도 그 말을 들은 내 쪽은 어떻게든 설명을 해 주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게 돼버린다. 내가 왜 자퇴를 했으며, 요즘 공교육에 대해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나는 자퇴를 했지만 엄연히 중학교를 졸업한 검정고시 통과자라는 것 까지. 설명을 하고 있노라면 가끔 내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한다. 특히 상대가 이해력이 부족하고 고지식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내가 버럭 성질을 낼 때는 아마 이 경우 중 2가지나 3가지가 한꺼번에 친구의 입에서 튀어나왔거나,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데 눈치 없이 그런 것으로 내 성질을 건드렸을 것이라 생각하면 쉽다. 물론 나도 인간인지라 다른 이유로도 화를 낼 때가 간혹 있지만, 정말 웬만하면 친구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 무른 성격이라 이 세 경우만 아니면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다.

사실 내가 화를 내는 경우의 원인을 살펴보면, 나는 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것들을 경험한 알찬 추억을 가진 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들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중요한 나의 재산이고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나의 지난 세월이다. 친구들의 짓궂은 질문을 오해를 풀게 되는 계기로 바꾸지 못한 채 무작정 화를 내는 나를 깨닫게 되면 역시 아직 멀었구나 싶다.

백수생활 5개월…… 여러 경험으로 꽤나 잡학다식 백수가 되어있다. 아직은 좀 수련중인 날카로운 백수. 하지만 악의를 갖지 않고 단순한 궁금증으로 내게 다가온다면 언제든 내 잡 지식과 내 주관을 털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착한 선생으로 돌변한다.

주의 - 잠잘 때 건들이지 마세요. 뭅니다.

안은초/ 16살 아웃사이더. 몇몇 대안학교를 다니다가 지금은 홈 스쿨을 하고 있어요. 주로 영월에 살면서 가끔 서울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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