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누구인가-지요하]

아침기도와 쓰레기 처리 등 소소한 일들을 마치고 이른 아침 컴퓨터 앞에 앉으면 맨 처음 하는 일이 어제 아침에 잔손질을 해놓은 오늘 치 ‘매일미사’를 내 홈페이지 ‘매일미사 방’에 올리고, ‘가톨릭 굿 뉴스’에서 내일 치 ‘매일미사’를 복사해 와 윈도우 문서 방에 붙인 다음 세밀히 읽어보면서 잔손질을 하는 일이다.

내일 치 ‘매일미사’를 하루 전에 읽어보는 것은 내일은 무슨 축일인지를 하루 전에 알고 있으려는 것이기도 하다. 미리 미사 내용을 숙지한 다음 미사를 지내려는 뜻이기도 하고, 평일미사에 참례하지 못할 경우에도 당일의 미사 내용을 알고 생활하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일을 4년째 계속하고 있다. 내 홈페이지 ‘매일미사’ 방의 상단에는 오늘 현재 1135라는 숫자가 올라 있다. 매일 아침 그 일을 하다 보니 매일같이 성경을 읽는 일도 겸하는 셈이 되었다.

매일같이 이른 아침부터 구약시대의 갖가지 사건들도 접하고, 예언자들의 활약과 눈물겨운 수난 고초들도 만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다니고, 하시는 일들을 보고 함께 생활하기도 한다. 그런 일 가운데서 내 하루하루의 삶은,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님을 닮고 따르는 것이어야 함을 자각하곤 한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판단하기 위한 노력임을 되새기곤 한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을 보면 눈물겨운 일들이 많다.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접하고 대중에게 전해야 하는 소명은 너무도 힘겹고 무겁다. 그 소명은 언제나 시대를 앞서가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시대를 앞서가는 일에서 예언의 소명이 발휘된다. 하지만 그 소명은 언제나 반대파의 표적이 되곤 한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그런 모습은 고스란히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시대 수많은 예언자들이 겪고 치른 온갖 수난의 결정판이기도 하다. 결국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함”을 알려 주시면서 인류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가셨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죄수가 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참혹한 고통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나름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씌워진 가장 큰 죄목이 ‘하느님 모독’이었다는 사실도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득권 세력에 의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특성’이 결정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신비한 ‘모순’의 핵심을 잘 헤아려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의 영역이지만,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수난 고통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역이다. 이 인간의 영역을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감히 ‘신앙의 신비’도 체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감사하고 환호하며 구원의 희망을 가지기에 앞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치르신 수난 고통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종교의 자유가 활짝 열린 오늘을 살망정 늘 예수님의 수난 고통에 동참하려는 마음자세를 지니고 살아야 한다.

그것의 하나가 예수님을 닮고 본받으려는 마음이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는 자세를 지니려고 노력해야 한다. 때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도 생각해야 하고,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도 떠올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어 천당 가려는 사람들이기에 앞서 예수님을 닮고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신앙으로 현세의 행복을 추구하기에 앞서 예수님을 닮기로 작정하고 ‘십자가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내 눈은 예수님의 눈인가? 내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인가? 늘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을 함부로 끌어대고 걸핏하면 하느님 소리를 하기에 앞서 내 말과 생각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 있고, 어떻게 예수님과 일치하거나 다른가, 고민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예수님 마음을 가지기에 앞서 이념적인 가치관을 앞세우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바른 태도가 아니다. 예수님이 표발하신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과 정의에 대한 가르침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에서 발현하신 것이었고, ‘사랑’이 바탕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념을 따지고 좌와 우를 가르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가령 국내에 남아도는 주체하기도 곤란한 쌀을 보내 북한 동포들을 돕자는 주장에 대해 김정일을 끌어들이고 퍼주기니 뭐니 하며 비난하는 말들은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 말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 현세적 이해타산만 쫓아 사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그리스도 신자들은 예수님의 마음, 사랑의 관점으로 보고 말해야 한다.

그동안 교회는 신자들을 교육함에 있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예수님을 닮고 본받기 위해 그리스도교를 선택했거나 신자 가정에서 성장했다면 말로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닮고 본받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너무도 안이했다.

교회 안에도 ‘가라지’가 너무도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디에나 밀과 가라지는 공존하게 마련이고 양과 염소들이 섞이기 마련이지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닮고 본받으려는 마음은 별로 없는, 걸핏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능멸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9월, 순교자 성월이다. 온갖 수난 고통 속에서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증언한 수많은 순교자들을 기리며 순교정신을 되새기는 달이다. 이념을 앞세우거나 좌와 우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좇아 극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의 길로 나아간 수많은 순교 선열들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예수님을 닮고 본받기로 다짐하자.

지요하 / 막시모, 소설가, 대전교구 태안성당 신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