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적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성향

옛말에 이르기를 良藥은 양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 이롭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쓴 것보다는 단 것을 취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단 것은 미소를 부르고 쓴 것은 찡그림을 부르죠.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에 과도한 트랜스지방이 문제가 된다고 하지만 단것에 대한 유혹은 실로 떨치기 어렵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가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날카로움보다는 부드러움을 취하고, 뜨거움이나 차가움보다는 적당한 정도의 안락함을 취합니다. ‘왜?’라고 따져 묻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왜이겠습니까? 부드러움과 안락함이 그저 좋기 때문이죠. 단 것에 끌리는 데에는 사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쓴 것보다는 단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죠.

뜨거운 물이나 아주 차가운 물을 피하고 적당한 온도의 물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것 또한 타고난 성향 때문입니다. 물론 ‘적당한’이란 관형어는 매우 애매한 단어입니다. 온도를 느끼는 인간의 감각은 매우 상대적이기 때문이죠. 가령 여름에는 에어컨 바람이 쾌적하게 느껴지고, 겨울에는 따끈한 구들장이 쾌적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인간은 쾌적함을 추구합니다. 불쾌지수가 높은 축축한 장마철에는 뽀송뽀송함이 그립다면 몹시 건조한 날에는 한 잔의 물이 간절해지는 법이죠. 이 역시 ‘왜?’라고 따져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죠.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도록 ‘생겨먹은’ 것이니까요?

대체 왜 인간은 쾌적함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것일까요? 진화심리학이니 하는 어려운 학문을 들먹이지 않고 찬찬히 한번 내 머리로 생각해볼까요. 만약 인간이 쾌적함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즉 고통과 같은 과도한 감각을 추구했다면 어땠을까요? 시고, 짜고, 맵고, 쓰고, 혀에 고통을 주는 과도한 감각을 인간이 추구했더라면 종합병원은 환자들로 차고 넘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랬다면 인간의 역사는 일찌감치 막을 내렸겠지요. 생존이 인간에게 부여된 지상과제라면 쾌적함의 추구는 인간이 온힘을 기울여 추구해야할 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쾌적함에 생명연장의 논리가 있을 테니까요.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이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명연장의 논리에서 찾습니다. 단맛은 그 음식이 훌륭한 영양 공급원이라는 증표이므로, 옛날 수렵채집 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환경에 적응하여 잘 생존하기 위해서 단맛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동물들도 놀이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조너선 밸컴의 <즐거움, 진화가 준 최고의 선물>은 즐거움, 즉 쾌락과 진화의 상관성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동물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줄이려 한다. 상처를 입은 쥐들은 순수한 물보다는 고통을 줄여줄 약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쓴맛이 나는 물을 자꾸 찾는다. 물고기는 전기 충격이나 낚싯바늘과 같은 해로운 자극을 피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대체 왜 동물들이 고통을 피하려고 할까요? 즐거움이 생존에 직접적인 혜택을 준다는 것이 저자의 답변입니다. 즐거움은 스트레스를 줄임으로써 생존가능성을 높이고, 엔도르핀과 같은 스트레스 감소물질을 분비하여 질병에 대한 몸의 방어능력을 강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동물들이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사례들을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열거합니다. 공을 물고와 주인 앞에 떨어뜨려놓고 머리를 쳐들고 주인에게 다시 던져달라고 기다리는 개, 풀린 실타래를 좇아가며 노는 고양이, 서로 깨물며 으르렁거리며 뒹구는 새끼 사자들 눈 덮인 둔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 수달, 서로, 서로 간지럼을 태우는 침팬지, 레슬링을 하는 코끼리의 사례를 들며 저자는 동물들도 놀이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보르네오 섬 푸팅 지역에 사는 오랑우탕을 소개합니다. 이 오랑우탄은 사람들이 ‘넘어지는 나무타기’라고 명명한 놀이를 하는데, 이것은 오랑우탄들이 죽은 나무에 올라타서 아래로 떨어지다가 나무가 땅에 닿기 전에 덩굴이나 다른 식물들을 붙잡아 탈출하는 놀이의 일종이랍니다. 이는 분명 동물들도 스릴을 즐기며 ‘논다’는 증거입니다. (왜 이런 스릴을 즐길까요? 저자는 진화론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스릴을 즐기는 행동은 분명 위험한 행동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용맹성과 신체적 날렵함을 이성에게 과시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짝짓기의 필요성에서 이성에게 작업을 거는 일종의 구애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죠.)

일찍이 네덜란드의 민속학자 호이징하는 그 제목이 ‘놀이하는 인간’으로 번역될 수 있는 <호모 루덴스>에서 인간의 삶이 여타의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은 인간의 삶이 놀이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학문이나 정치, 예술과 종교, 심지어 전쟁 등 인간의 활동 중에서 놀이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이 호이징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너선 밸컴의 <즐거움, 진화가 준 최고의 선물>은 놀이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영역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조너선 밸컴의 책을 읽다보면 동물은 생존에 꼭 필요한 행동만을 한다는 우리의 생각이 커다란 착각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자는 최소한 300종의 동물들이 동성애를 즐긴다고 합니다. 저자는 졸고 있는 늑대를 부리로 톡톡 건드리며 위험한 상황을 즐기고 있는 큰까마귀들을 소개합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행동이 생존에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그런 행동을 할까요. 바로 ‘즐거움’ 때문이라는 거죠. 이런 사정을 감안해서 본다면 인간이나 동물이나 오직 생존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즐거움이 삶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만이 즐거움을 향유하고 감정을 지닌다는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돼지나 닭, 소를 사육하는 축사의 시설을 단계적으로 개선해나가기로 합의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둡고 악취 풍기는 콘크리트 바닥에서 평생 새끼만 낳는 동물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동물들도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거죠. 인간의 휴머니즘이 동물들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는 셈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했습니다. 운동선수가 땀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연습의 시간에 몰두하는 것도, 사업가가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학생들이 밤을 새우며 시험공부에 몰두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보면 행복해지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정신이상자가 아닌 바에야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종교인들은 금식을 하고, 침묵을 하며 고행을 합니다만 그들도 정신적인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 안에서의 행복감’이 바로 그것이죠. 고통마저도 행복으로 느끼는 것이 종교의 역설이죠. 〈십자가〉라는 시에서 윤동주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수를 두고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것도 바로 이런 종교의 역설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죠.

군자란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행보그이 정복>,버트란트 러셀, 사회평론
<행복의 정복>에서 버트란트 러셀은 군자란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합리적인 도덕 원칙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행동은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물론 이런 논리가 성립되려면, 그런 행동은 결코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행동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금욕주의를 제쳐두고 이야기한다면, 이상적인 도덕군자란 즐거움의 효과를 능가할 만한 나쁜 결과가 생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모든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동양에서 군자라면 극기(克己)니 수기(修己)니 하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죠. 극기란 욕망을 실현하는 데 있지 않고 인내하고 절제하는 데 있는 것이라면 군자는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러셀의 정의는 동양의 상식을 많이 벗어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러셀은 이러쿵저러쿵 교훈을 늘어놓으며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윤리학자는 아니었습니다. 러셀에게서 철학은 즐거움을 주는 것이었지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었죠. 러셀은 죄가 되지 않는 선에서 즐기는 삶을 살라고 권유했습니다. 술이나 담배를 죄악시하는 쓸데없는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 때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러셀은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필요 없이 과도한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라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러셀의 주문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한 나라의 법무부 장관을 맡았다면 세상은 180도로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성(性)에 대해서도 불결하다는 식의 편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교육의 올바른 원칙은 간단하다. 사춘기가 되기 전에는 어떠한 성도덕도 가르치지 말고, 자연스런 신체기능에 대해 혐오감을 주입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남에게 해악을 주지 않는 한에서 즐기라는 식의 쾌락주의를 러셀은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러셀의 이러한 충고를 달갑게 여기지 않을 사람들도 많습니다. 고등학교의 학생부 지도 선생님들은 두 말할 것도 없겠구요. 하지만 러셀의 주장은 깊이 음미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필요 없는 죄의식에서 해방되어야 인간은 행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학생은 공부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는 생각은 학생들을 불행하게 합니다. 부모는 자식 교육에만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은 부모들을 병들게 합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은 교사와 부모의 마음을 지치게 합니다. 모든 사적인 것을 떨치고 오직 공적인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이데올로기는 국민들을 병들게 하죠.

그런 이데올로기는 쓸데없이 국민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줍니다. 그런 이데올로기는 즐거움과 쾌락을 저열하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만드는 근거 없는 정신주의를 조장합니다. 왜 우리가 공적인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할까요? 왜 내 자신의 내밀한 욕망에 기를 기울이면 안 될까요? 부모와 교사나 목사와 같이 누군가를 훈육하고 계도할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서는 안 될입니다.

<행복의 정복>에서 러셀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일만 아니라면, 어떤 즐거움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강'을 수집한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강을 수집한다. 나는 볼가강이나 양자강을 오르내리면 즐거워진다. 그리고 아직 아마존 강이나 오리노코 강에 가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이런 감정상태가 단순한 것이라고 해도 나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

‘강을 수집한다고’ 했지만 정작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강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 보고 저 강도 보면서 강에서 느끼는 운치와 즐거움을 망각한다는 것이겠지요. 산길이나 강 길을 걸으며 풍경에서 고즈넉한 즐거움을 얻는 일은 참으로 운치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삶을 반성하고 관조하는 즐거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권태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라

러셀은 삶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약물의 즐거움과 같은 과도한 감각적 자극을 추구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말합니다. “자극이 지나치게 많은 삶은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들은 환희에 가까운 감격이야말로 즐거움의 필수요소라고 여기기 때문에, 끊임없이 감격을 느끼기 위해서 점점 더 강력한 자극을 찾을 수밖에 없다. 지나친 자극에 익숙해져버린 사람은 후추를 병적으로 좋아해서 결국 남들이 보기에는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은 후추를 먹어도, 정작 본인은 별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과 비슷하다. 권태의 어떤 요소는 지나치게 많은 자극을 피하는 것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마치 후추처럼 강렬한 자극은 감각을 무디게 한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강렬한 자극보다는 권태를 이길 수 있는 힘이 행복에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합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현대인들이 백 년 전의 사람들보다 고립이나 권태의 시간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백 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느끼는 권태감은 더욱 심해진다. 중세의 어느 마을에서 겨울을 맞은 사람들의 단조로운 삶을 상상해보라. 사람들은 읽고 쓰기도 할 줄 몰랐으며,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촛불밖에 없었고, 지독한 추위를 막기 위해 화롯불이 놓인 유일한 방 안에는 화롯불에서 나온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길은 거의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서 찾아온 사람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당시의 생활은 이루 말할 것 없이 지루했으며 마녀 사냥의 관습만이 겨울 저녁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였을 것이다. 조상들에 비해 우리가 겪고 있는 권태의 정도는 덜하지만, 권태에 대한 두려움은 훨씬 깊다. 우리는 권태란 인간이 당연히 겪어야 하는 운명의 일부가 아니며, 자극을 찾아 나설 정도의 단호함만 있으면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락기구나 통신기기의 도움을 빌려서라 손쉽게 권태를 피할 수 있고, 자극을 추구할 수 있으니 현대인들은 권태를 당연히 겪어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 년 전의 사람들은 권태에 대해 우리들보다 훨씬 면역력이 강했습니다. 권태를 피할 수 없다면 그것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말이죠. 옛날이야기도 하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민담도 들으며 그들도 나름대로 권태를 이겼겠죠.

러셀은 말합니다. “권태가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권태에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 황폐하게 하는 것, 두 종류가 있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권태는 약물이 없는 곳에서 자라나고, 삶을 황폐하게 하는 권태는 활기찬 행동이 없는 곳에서 자라난다.”

그가 말하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권태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정극인의 〈상춘곡>에서 화자는 산 속의 하루가 적적하다고 하면서도 이리 저리 시를 읊조리면서 천천히 거닐며 새소리를 듣고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삶을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권태가 강호를 거닐며 삶을 성찰하게 하고, 시가를 낳고 예술작품을 낳는 ‘창조적인 권태’가 아닐까요.

권태는 늘 반복되는 일상의 기계적인 시간에서 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창조와 발견의 즐거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에도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즐거움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멀티미디어 기기들이 제공하는 감각적 경험 없이도 말입니다. 바로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탑재된 상상의 힘으로 말입니다.

친구들과 가족들 사이에 있었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며 상상에 빠져들 수도 있고, 예전에 읽은 소설 속의 공간으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볼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우리의 두뇌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습니다. 어떤 테크놀로지의 도움이 없이도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상상의 힘을 키우려면, 강물이 사람과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내 나라의 산하를 내 다리로 걷고, 독서가 제공하는 광대한 공간 속을 내 몸으로 걸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접속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접어두고 말입니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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