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 요한복음서와의 낯선 여행/김진호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을 읽으면, 여전히 '성경'은 열려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성경'을 '그들만의 책'이라고 여기지만, 아닙니다. 성경은 그 누구나가 읽고, 함께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함께 '만들어 가야' 할 책입니다. 김진호 목사와 그의 스승이었던 안병무 선생의 숨결이 공존하는 이 요한복음 해설서는 '종교'와 '사회'의 결을 잇는 시도가 담긴 의미 있는 저작입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믿음의 근거는,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라는 단순한 신뢰와 불신의 측정도를 따지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믿음의 강도를 타인과 비교하며, 개인의 신앙을 '계발'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라는 커뮤니티 안에서, 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들을 모색하고 생산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추락하는 말씀의 위상을 다시 생각하며

"로고스가 '살덩이(싸륵스)'가 되었다"(14절a), '몸'(소마)이 아니라 살덩이다. 성/승화된 혹은 성/승화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세속화된 몸이다. 어떤 아름다운 말로 치장해도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적나라함 그 자체다. 반면 '소마'는 미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육체/존재를 가리킨다. 예컨대 영웅의 몸, 예언자의 몸 등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웅인들, 어떤 위대한 예언자인들 그 속이 곪아 터지지 않은 육체를 갖고 있으랴. 다만, 그 시대의 언어가 그렇지 않은 듯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31쪽) 

이 책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 개념 두 가지, 소마와 싸륵스가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 우리가 인식해야 할 역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임을 아는데, 이 두 개념은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습니다. 인용하였듯이, 소마는 영웅의 몸과 예언자의 몸, 그 몸의 위대함을 미화시키고, 신화화시키는 데 투영되는 '찬미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런 찬미의 언어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역사학에서, 아주 초기에 해당했던, 일종의 '영웅적 전기'의 맥락에만 머무름으로써, 우리가 말씀을 통해 다시 품어야 할 사회적 진실의 가치들을 고찰하는 데 한계를 갖게 합니다. 말씀 안에 담긴 현실을 직시하기. 고로 말씀 자체를 둘러싼 포장을 벗겨 내고, 피와 뼈의 존재, 그 존재의 즙이 보일 것만 같은, 삶 그 자체의 언어, 민중의 언어인 '싸륵스'가 주는 새로운 역사적 시선으로 요한복음을 읽어볼 것을 본 책은 권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권유에 동의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 1)

이 말씀 자체가 '소마'의 테두리에 머물렀을 때, 요한복음의 본 서언은, 고집스러운 신화의 감옥에 갇힌다고 봅니다. 오히려 우리는 '말씀'의 존재인 하느님의 이야기 안에서, 말씀의 존재와 관계 맺을 수 있는 시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맥락 안에서, 오늘날 예배 시간에, 자신의 말에 우위를 두고, 정작 성경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달변가'적인 목자들은 무엇이 진정 신앙의 바탕인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체계가 틀지운 풍요로움의 언어들이 설교에 스며들고, 그 풍요로움의 언어에 기대어, 나눔을 가장한 '소유의 독선'에 길을 내주고, '빈곤을 향해 가는 미래'에 점점 무관심한 그들이 내세우는 '봉사'라는 이름은 과연 무엇인지, 저는 의문입니다. 오직 이 '말씀'에 담긴 것은 자신의 존재론적 안전에 핵심인, '자본주의적 시스템에 잘 순응하기'로 축약되고 있습니다.

헌금을 내고, 함께 축복을 하는 시간. 성직자들이 신도들의 존재론적 안전을 위해 공유하는 언어를 듣고 있노라면, 이 안에서 점점 증가하는 건, "내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남과 함께 생존의 가치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먼저 생존의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다"라는 생존의 담론만이 강조되는 듯합니다.

이 생존의 담론이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의 허물을 인식하고, 그 허물을 보완할 수 있는 사회적 치유의 언어를 함께 고민하는 것이 예수의 사명이 아니었나, 저는 그렇게 믿고 싶은데요. 오늘날 교회는 직제화된 틀 속에서, 예수의 신화화를 통한 고통의 거래에만 관심을 쏟는 듯합니다. 그것을 깨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더 깊숙하게 해석하고, 재해독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사유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이 품고 있는 의도 중 하나일 테지요. 

고통을 거래하는 자들의 사적 네트워크를 깨기

그 거대한 담론들은 고통받는 이의 시선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고통을 거래함으로써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부류의 체계 혹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115쪽)

저자가 <요한복음>을 해설하면서, 우리 시대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적 네트워크'의 강화입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이 '사적 네트워크'의 강화를 추동했던 종교적 공동체의 이면을 말씀을 통해 보면서, 혈연-지연-학연이라는 '속'의 언어를 오히려 더 강화하는 '성'의 언어 세계인 그리스도교가 갖는 아이러니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는 전략적 선택의 합리성이 닮은꼴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과 어떻게 연루되고 있는지를 보게 된다. 아무튼,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대단히 획일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질적인 것에 지나치게 배타적인 얼굴을 하게 되었다. 미궁 속에 가두어둔 자신의 괴물적 속성은 이들 이질적인 존재를 희생양 삼아 존재하는 우리 내면의 야수성인 셈이다. 이질적인 약자를 잡아먹는 미노타우르스는 우리 문명이 낳은 우리 자신의 괴물적 속성인 것이다.(59쪽)

현대 교회가 관계 맺는 자본주의적 증식은 단순히 교회의 외형 확장에만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스며든 자본에 대한 강조와 이것에 좌우되는 삶을 둘러싼 개인의 위상 확보입니다. 또 그것으로 구성된 신자유주의적 시민의 일상을 주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관성화된 실천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스스로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상징 자본'으로 전락했고, 교회에 다니는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믿음을 회복한다는 변 안에서, 타인의 가치와 비교하기 위한 '고백의 장치'로 사용하는 무서운 현실이 있습니다.

그 어느 결혼 주선 회사보다 뜨거운 스펙 알리기와 인연 맺기가 교회 안에 가득하고, 청년들이 그동안 쌓아온 믿음을 향한 열정과 애정의 모습들은, 사회가 간주하는 일방적 성공의 틀에 진입했다는, 엇나간 자부심의 팽창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정작 사랑이라는 이름은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과 도와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도식을 따르고, 사랑이라는 가치가 혐오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신앙이 '거래'되고, '유통'되는 현실. 이 현실을 구성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사적 네트워크, 그 시스템의 폭력은 고로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한국 사회의 모순과 구별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목자들이 사회에 대한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부조리를 욕하는 것, 교회의 성과 세상의 속을 구분하며, "너희는 저렇게 살아선 안 된다."라는 지상명제의 설파는, 바로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입니다. 

결국, 다시 돌아오는 근본적 문제, 신앙에 대하여

안병무 선생이 촉발한 이 복음서의 민중신학적 상상력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신랄하다. 왜 우리 신앙은 자신도 모르게 배타적인 심성을 강하게 담고 있는가, 왜 우리 신앙은 선교 현장마다 증오를 낳고 싸움을 낳고 주검을 낳는가, 왜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문제시하는가, 왜 사람들은 속속 교회에서 철수하고 있고, 왜 대안적 신앙에 대한 바람을 그토록 강력하게 타전하고 있는가.(241쪽)

결국, 저자가 촉구하는 것은, 우리가 외면하고 회피하려는, 하지만 자신이 가장 잘 실천하고 있다거나, 가장 미미하다고 고개 숙인 채 포기하는 그 신앙의 언어를 사회와 함께 사유하는 방식의 형성입니다. 이 형성의 과정엔, 가장 따가운 성찰, 그리고 둘러가지 않는 '직언'의 사례에 대한 의미 있는 공론장이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그리스도교 외부의 실천과 그 사회적 재앙들을 삶에 찌든 자들의 가학적 쾌락으로 이해하지 않거나, 또 그들의 발화가 그런 쾌락으로 마무리되지 않으려면, 말씀의 존재는 단순히 종교가 긋는 외부와 내부라는 굵은 선에 대한 영역 가두기가 아니라, 말씀을 향한 적극적인 개입과 이로 말미암아 형성된 새로운 사회적 관계일 것입니다.

이 새로운 관계를 통해 저는, 성경을 더 그들만이 읽는 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구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 그 공공성을 향한 열정을 마련할 수 있는 지혜의 저장고로 인식하고 싶습니다. 단순히 미화된 한 영웅의 전기가 아니라, 이 안에 스며든 민중의 고통을 체감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사회적 의미로 생산하려 했던 예수의 형상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실천이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한복음의 서언을 다시 읽어봅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 1)

말씀과 신의 존재를 이어봄으로써, 우리의 시선은 마냥 말씀의 신화에 안주하고 그 확실성에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책은 그런 '확실성'이 갖는 폭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말씀이 되어 세상에 내려온 예수라는 이의 실천 안에서, 우리는 말씀과 민중의 평화를 모색해봅니다. 맨발로 땅을 밟으며, 그 땅의 온기와 울퉁불퉁함을 느낄 수 있는 용기. 그 용기를 통해 정작 우리 시대가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행여 고통을 치료한다는 것이 자신의 안위를 과신하고, 명예를 확보하는 데 쓰이는 물신적 도구의 하나로 추락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이 주는 그 따가움은 저도 피해갈 수 없을 듯합니다.

확실성에 관한 기억, 그 환희 어린 '각'의 체험은, 그 체험으로 말미암은 확고한 신념으로 구성된 정체성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많은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단순 명확하게 그 색깔을 드러내리라는 믿음이 그 환희 어린 정체성 속에는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선명함 속에 인류의 만행이, 인간이라는 종의 그 잔혹성이 존재의 속성으로 새겨지고 있었던 것이다.(143쪽)

김신식/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재학중, 당대비평 생각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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