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누구인가]

▲ 사진/한상봉 기자
불교에서는 삼세불(三世佛), 곧 과거불(燃燈佛, Dipakara), 현재불(釋迦佛, Sakyamuni), 미래불(彌勒佛, Maitreya)을 모시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 선재설, 나사렛 사람 예수, 재림주와 같은 예수상에 비슷하게 대칭된다.

그리스도 선재설은 그분께서 한 처음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으로, 교부시대의 성삼론·그리스도론·구원론 등의 교의논쟁과 더불어 믿을 교리의 대부분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그 다음은 이 땅에 사셨던 사람의 아들 예수로, 초대교회에선 그분의 삶 자체가 더없이 소중했기에 그 기억이 복음서도 낳았지만, 사도시대가 지나면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아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마지막으로 재림주 예수인데, 종말을 기다렸던 초대교회 때나 밀레니엄 시대처럼 종말론에 휩쓸리는 때를 제외하곤 주목받지 못한 예수상이다.

이 가운데 어디에 눈길을 주느냐에 따라 신앙과 삶에 담겨질 내용도 달라진다. 하느님의 아들이나 재림주라면 보다 내세지향적이 될 것이고, 사람의 아들이라면 아무래도 지금 여기의 삶을 보다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지난 2천년은 앞의 예수상이 압도적으로 신앙세계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와, 사람의 아들로 30여년 사셨던 갈릴래아 예수의 삶이 새롭게 조명받으며 부활하고 있다. 불교 선사들의 “과거불에 집착 말고 자기 안의 현재불을 찾아 지금 여기의 깨침을 구하라.”는 화두가 문뜩 연상되면서, 무척 반갑기만 하다.

우리는 <신학대전>에서보다, 그 시대의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사시다 돌아가신 그분의 삶과 마음에서 오히려 하느님을 만난다. 교회는 그 마음에서 태어났고, 그분 몸소 당신의 그 마음을 지닌 자, 곧 당신 마음에 두셨던 자들을 제자로 불러 모으자,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되었다.

그분께서 지금도 교회 안에 그 마음이 살아 숨쉬기를 바라신다. 그 마음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여기시는 까닭이다. 인간이 교회의 길인 것도 그분께서 그 마음으로 그 길을 온전히 걸으셨기 때문이다. 교회가 인간을 저버려선 안 되는 까닭도 당신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온전히 사랑하신 그 마음이 그들 안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교회는 매순간 그리고 나날이 걸어가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세상만이 아니라 교회공동체 구원을 위해서라도 취해야할 길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교회마저 시대의 흐름을 좇아 견고한 보수성(保守城)을 쌓아올리고 가난한 이들이 마음 편하게 어깨 펴고 들어갈 성문(城門)은 폐쇄된지 오래 전이다. 교회의 들판에선 예언적 외침이 들리지 않고 교회의 언덕에선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다. 급기야 한국교회에서는 어느 시인의 슬픈 노래처럼 날마다 '서울의 예수'가 쫓겨나고 있다.

잃어버린 교회의 정신과 영혼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 다시 마음이다. 예수의 그 마음, 가엾은 죄인들과 병자들을 향해 시도 때도 없이 즉시 열리셨던 측은지심의 그 마음, 그 마음을 다시 교회가 지녀야 한다. 똑똑한 머리가 아니라 착한 마음이다. 스승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 마음으로 아픔의 이 세상을 온전히 껴안아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교회의 생명력도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 과연 그분은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고쳐주려 오셨다(전례헌장 5).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후원회소식지 <기쁨과 희망> 2010년 7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정중규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어둠 속에 갇힌 불꽃’(http://cafe.daum.net/bulkot )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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