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갇힌 불꽃]

종철이의 죽음이 내 가슴에 말뚝처럼 박히며

그날 내게 신(神)이 내렸다. 우리의 종철이가 욕조가 달린 고문실에서 갖가지 고문에 못 이겨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 온 그해 1월 어느 날 나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당한 것처럼 한없이 억울해 종철이의 사진만 봐도 눈물이 솟쳤고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면 종철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럴 순 없는데, 정말 이럴 순 없는 데…’ 낮에는 열병으로 밤이면 뜬눈으로 지새우길 며칠, 무언가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그것은 글이라기보다는 가슴에서 솟구치는 외침이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자.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손을 들고 만다.”라는 고백 그대로였다.

그렇게 생겨난 글들을 그 당시 시사적인 글을 게재하던 천주교 부산교구 주보 <가톨릭부산>의 ‘장대골’난에 투고해 실었다. 글에다 격정을 쏟아 부으며 그해 87년의 봄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물론 58년 개띠에다 모래시계 세대로서, 특히 생래적으로 반골적이었던 나는, 그 당시 창립되었던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또한 2월12일 총선과 신민당의 직선제쟁취 개헌서명대회에 군중으로 참가했을 정도로 민주화 운동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은 심정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철이의 죽음이 내 가슴에 말뚝처럼 박히며 선연히 피어난 피멍의 꽃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당시 6월 항쟁에 참여하게 되었던 모든 시민들이 그러했듯 본질적인 변화를 입으며 아주 정치적으로 되어 갔다. 광주시민의 피를 묻히며 집권한 원죄를 안고 있어 집권 내내 정통성 시비에 휩싸였던 전두환 정권의 반인륜적인 속성이 이로써 다시금 만천하에 폭로되자 모두의 가슴속에는 “이래선 안 된다. 이런 정권은 우리 손으로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라는 사명의식이 분연히 자리 잡게 되었다. 민중을 죽이는 현실은 민중을 부활케 한다고, 참으로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던 것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장대골’난에 실렸던 내 글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니다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할 25시의 한밤중이다. 인간의 생명이 동전의 가치로 다뤄지고 거리낌 없이 인간이 마구 도살당하는 이 무서운 시대에 우리는 파수꾼이 되어 눈을 부릅뜨고 양심의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도록 쉼 없이 이 땅을 살펴봐야 한다. 인간이 이렇게 죽어 가고 있는데 그 곁에서 잠듦은 그 자체가 죄악이다. 모든 불의와 거짓과 폭력에 대항하며 땅속에 갇혀 피로써 울부짖는 죽은 아벨들의 소리를 우리의 가슴에 담아 외치고 또 외쳐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 주려고 있는 공권력에 의해 오히려 살인적 고문이 자행돼 처녀가 한밤중 밀실에 갇혀 공적인 강간을 당하고 백주에 청년이 독방에서 무수히 구타당하며 물 먹인 소처럼 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맞아 죽은 놀라운 사건들…. 악하고도 무서운 침묵이 거짓의 옷을 걸쳐 입고 위선적인 허세를 부리며 온 땅을 압제하는 이 참담한 현실 한 가운데에 그들은 맨몸으로 뛰어들어 가슴엔 한 맺히고 온몸엔 피멍 들게 하는 극한의 아픔을 용기 있게 껴안고서 자신의 인격과 목숨의 죽음을 통해 철저히 은폐되었던 악의 실상을 온 누리에 폭로하며 그들 자신의 죽음의 놀라운 힘으로 악의 심장부 한가운데에 심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직도 이 시대의 국외자로 자족할 것인가? 점잖은 방관자로 자적할 것인가? 아니면 멍든 처녀 가슴은 오랏줄에 묶여 옥에 갇히고, 고문 형사는 오히려 활개치며 돌아다니는, 주객전도의 기이한 일들이 예사로 벌어지는 이 별난 세상에 그 또한 하나의 이상한 일로 여기며 무심히 지나칠 것인가? 그럴 순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는 모두가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그들의 죽음을 끝없이 외쳐야 한다.

이젠 ‘전가의 보도’처럼 언론기본법을 마구 휘두르며 보도지침 내리랴 사전검열하랴 여론 조작하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그 짓을 멀뚱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했지만, 그 피란 진실에의 용기만이 지닐 수 있는 것. 창녀가 정조를 들먹이고 살인강도가 ‘법대로’를 내세우며 독점과 독식의 온갖 불의와 폭력을 일삼는 무리들이 정의사회를 떠드는 이 정신분열증적인 상황 속에서, 더욱이 속과 겉 소리가 항상 다르고 때와 장소에 따라 딴소리하길 서슴지 않는 변절과 무지조의 이 시대에서 오로지 한목소리로 진실을 항상 외칠 수 있는 용기 있는 양심들이 하나 둘 순교의 심정으로 깨어 일어나 덮고 있는 어둠의 장막을 들어 올릴 때, 진실의 공간은 그만큼 더 넓혀지고 그곳이 바로 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영역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개개인 모두가 하나의 언론이 되자. 있는 그대로, 보는 그대로, 생각하는 그대로 떳떳이 밝힐 수 있는 정론 직필의 진실한 언론이 되자."

6월 항쟁 한가운데서 

그로부터 참으로 ‘어둠이 판을 치고 돌들이 소리치는 시대’였던 그 역사의 현장에 몸을 사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택시에다 휠체어를 싣고 다니며 부산에서 열리는 집회마다 열심히 참여해 시대의 아픔을 느끼고 역사를 호흡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당시 직선제 개헌투쟁을 통하여 독재정권의 종식을 요구하는 국민적 요구가 확산되자 전두환 정권은 상투적으로 “88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의 위협이…”하며 물리적인 탄압을 한층 강화하며 집권연장을 획책하지만, 박종철 고문살인사건이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발생해 신문에 폭로되자 그렇지 않아도 부천 성고문사건으로 폭압 정권의 부도덕성에 치를 떨었던 국민의 정서는 폭발하게 된다. 온 국민의 분노 속에 개헌 정국은 곧바로 고문정국으로 치닫게 되고, 경찰의 원천봉쇄 속에 개최된 ‘2·7 국민추도집회’와 ‘3·3 평화대행진’에 의해 반정부적인 분위기는 더욱 고조된다.

4월13일 호헌조치가 발표되었지만, 즉각 거센 반대 여론에 부딪혀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및 사회 각계에서 호헌철회를 요구하는 시국선언과 단식농성 및 기도회가 잇달았으며, 우리 천주교 부산교구의 움직임도 심상찮아 지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이는 장소마다 “이래선 안 된다.”라는 결의가 너무도 분명히 보였다.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았던 그 해의 봄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거기에다 5월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사태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 축소되었음을 폭로하자, ‘올 것이 왔구나!’ 싶을 만큼 혁명전야 같은 긴박함마저 느껴졌다. 실정(失政)은 실권(失權)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었다. 그런 가운데 발족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6월 항쟁의 대장정을 향한 첫걸음으로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차기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6월10일에 맞춰 전국에서 개최하게 된다.

6월 항쟁의 종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던 그날, 기미년 3·1운동에 버금갈 만큼 전국민적 항쟁이었던 그날, 나는 아침 일찍부터 휠체어를 타고 부산가톨릭센터로 갔다. 마침 그곳은 5·18광주민주항쟁 관련 고발사진전과 기록영화제로 후덥한 날씨만큼이나 관람자들의 뜨거운 열기로 온통 달아 있었다. 처참한 학살의 현장을 찍은 사진과 영상물을 거듭 보며 모두들 뜨거운 눈물 훔치면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거기서 휠체어를 타고서 있는 나를 보고 누군가 “저 사람도 광주사태 부상자인가 봐!” 해서 시선 집중되었던 웃지 못할 일도 겪었다.

가톨릭센터 안까지 최루탄이 투척되어

오후 늦게 천주교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의 시국강연이 가톨릭센터 소극장에서 열렸다. 바깥에서는 벌써 간간이 터지는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군중들의 함성과 오가는 시위대열의 웅성거림이 입체적으로 들려 왔다. 강연회를 진행하면서도 강연자도 청중도 귀는 토끼처럼 쫑긋 밖을 향하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자 가톨릭센터 안까지 최루탄이 투척되어 건물 내부가 연기로 자욱해지자 강연회는 중단되고 정문 셔터가 내려져 나는 휠체어를 굴리며 잿빛 거리로 나왔다. 가톨릭센터에서 국제시장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엔 거리에서 농성하는 이들과 그에 호응하는 시민 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쳐주는 진압경찰들에 둘러싸여 하나 가득 운집해 있었고, 즉석 시국집회장은 자발적인 연사들이 나와 독재정권을 성토하고 운동권 노래와 박수와 손수건이 물결 치듯 함께 하며 필승의 전의를 다지는 신명나는 한마당으로 변해 있었다.

경찰의 검문을 피해 뒷골목을 통해 국제시장을 지나 남포동 거리와 자갈치시장으로 접어들자 골목과 거리 곳곳엔 벌써 시민들과 진압경찰들이 마치 민중과 독재권력 사이의 대치선처럼 마주치고 있었고, 거리는 벌써 최루가스로 뒤범벅되어 안갯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미리 준비해 간 큰 타월로 코를 막고 버티려 했지만 쏟아져 내리는 눈물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제 분명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직감에 또 그 역사의 현장에 내가 함께하고 있다는 뿌듯한 심정과 격한 흥분에 행복하기조차 했다. 그래 이제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 세상은 이렇게 오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새 세상은 바로 이렇게 오는 것이다. 휠체어를 굴리며 국제시장과 남포동 그리고 자갈치시장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또한 시위대와 함께 이 골목 저 골목 쫓겨 다니면서 가슴으로 절규했다.

부산은 6월 항쟁의 분화구였다

그렇게 밤늦도록 시위에 동참하다 자정쯤 되어 시위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신명나기는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는 택시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우리는 민주화의 동승자였다.

집에 와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올 리 만무했다. 갖고 간 타월은 물론이고 옷가지와 온몸이 온통 최루가스 냄새로 뒤범벅되어 있었지만, 그저 흥겨웠다. 역사의 전진을 내 눈과 가슴으로 똑똑히 확인한 까닭이다. 전면에 드러난 역사의 수레바퀴 그 얼굴을 똑똑히 본 것이다. 그것은 순리였고 천리였고 그 힘이었으며 궁극적으론 혁명이었다. 아닌 ‘천심은 민심’이라는 바로 그 민중의 실체였다. 철옹성 같았던 전두환 군부독재의 폭압적 권력마저도 민중의 노도와 같은 물결 앞에 허물어질 수밖에 없음을 나는 확신했다.

사실 부산은 6월 항쟁의 분화구였다. 그 규모나 지속성에서 타 지역을 능가했으며, 특히 16일부터 시작된 가톨릭센터 농성과 철야시위, 그중에서도 서면로타리가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3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18일의 밤 시위는 6월 항쟁의 대세를 결정짓는 시위였다.

백골단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지랄탄이 난무하는 공포의 분위기에서도 시민들은 ‘부산이 일어서면 나라가 바뀐다.’라는 신념과 긍지로 시위에 동참하였다. 직접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시민들조차도 진압경찰에 쫓기는 시위대를 숨겨 주거나 시위대가 필요한 갖가지 필수품을 전달해 주면서 또는 항쟁소식을 실은 유인물들을 주워 읽으면서 모두가 한마음 한몸이 되었다.

어쩌면 6월 항쟁의 대미는 부산이 장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부마항쟁으로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부산시민들은 민주화를 향한 뜨거운 갈망으로 6월 항쟁 기간을 통해 전국의 어떤 지역보다도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여했던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은 돌아왔다

이 땅의 봄은 정말 뜻깊기만 하다. 3·1을 시작으로 4·19를 거쳐 바로 5·18과 6·10으로 달음질쳐 나아가는 이 계절은 4중주의 현묘한 화음으로 열병처럼 들쑤시며 심장에 산 피를 수혈해 주고 새로운 춤과 노래로 겨우내 잠들었던 우리의 혼을 다시 깨우는 축제의 때이다. 진정 이 봄은 숱한 김주열의 봄이요, 숱한 전태일의 봄이요, 또한 박종철의 봄이다.

그러기에 6월 항쟁은 완결된 사건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특히 가슴마다 따습게 손길마다 따습게 눈길마다 따습게 서로를 온전히 받아 주었던 6월 항쟁의 대동정신은 죽음의 빈 들판에 내팽개쳐진 지금의 우리 사회와 민족을 되살리는데 꼭 지녀야 할 것이다. 6월 항쟁 정신의 역사적 계승이야말로 사회통합과 민족통일의 첩경이리라.

올해도 어김없이 6월은 돌아왔다. 23년 전의 과거사이지만, 그날 이후 내 가슴은 언제나 6월 그날에 숨 쉬고 있다. 6월 항쟁의 체험은 내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것이었다. 내 삶의 몸짓과 외침 하나하나가 은연중에 6월 그날을 향한 신명나는 춤과 노래로 변형될 때면, 6월 그날에 지금 바로 여기의 내 삶의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진심으로 6월 항쟁에 감사하고 싶어진다. 한번 6·10세대는 영원한 6·10세대인 것이다.

정중규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다음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지기,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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