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시사비평]

나는 1950년 경인년생, ‘6.25동이’ 이다. 전쟁의 상흔을 깊이 간직할 수밖에 없다. 너무 어렸었기에 전장의 기억을 떠올릴 수는 없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어린 핏덩어리를 껴안고 사선을 뛰어넘었던 고초가 얼마나 크고 처절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2010년 6월은 ‘6.25동이’에게 그 의미가 각별하다.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시작하여 환갑을 맞는 오늘의 6월. 그 빛깔은 얼마나 달라진 것일까? 까맣게 말라붙은 핏빛에 대한 기억이 60년의 세월에 닦여 연녹색 생명의 빛, 파랗게 피어오르는 희망의 빛으로 변화되었음을 느낄 수 있는가? 자문해 보면 “아니다.” 너무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60년 전으로 되돌아가자.”고 하는 핏빛 뇌성이 울려 퍼지는 것 같다. 도대체 어찌된 셈인가.

전쟁은 오만한 권력이 팽창하는 힘이다. 전쟁이란 용어가 주요 언론매체에 아무렇지도 않게 오르내리는 요즘의 모습은 마치 난로 위에 놓인 물주전자가 뿜어내는 뜨거운 증기를 연상시킨다. 국민들로부터 위탁받은 권력이 무엇을 향해 팽창하는 것인지. 왜 그토록 끓고 있는 것인지. 그 목표가 과연 무엇인지를 과연 어느 누가 어느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 것인지 조차 모를 정도로 혼돈스럽다.

그래서인지 몇 몇 지식인들의 탄식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그 ‘팽창의 힘’이 빚어내는 ‘극단의 시대’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감이다. “뜻있는 이들의 바람과 달리 세상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균형을 잡기 위한 긴장은 보이지 않고 편 가르고 다른 편을 말살하려는 권력욕만 보인다. 우리 역사가 그런 천박한 수준은 벗어났을 거라는 낙관은 한 순간에 뭉개져 버렸다.”는 절망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자칫 근본주의로 흘러 자기통제를 상실한 전쟁기계 그 자체가 되는” ‘극단의 시대’에 대한 두려움도 금할 수 없다.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근본주의가 뿜어내는 맹목성이 ‘광신의 시대’를 불러 엄청난 희생을 초래했음을 보여준다. 유럽이 히틀러의 광풍에 따른 희생물이었다면, 우리 역시 천황을 빙자한 광풍의 희생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에게 언제 그런 뼈아픈 기억이 있었냐는 듯 “이제는 전쟁이라도 해야겠다.”고 이를 악무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들은 과연 누구이고, 또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칸트는 인간이란 이성을 사용해 스스로 법칙을 세우고 그 법칙에 입각해 행위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세운 원칙을 자기가 지키는 것, 바로 이것이 자유라고 했다. 또한 인간은 누구나 이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처럼 가치기준이 혼탁해진 시대에는 스스로 이성을 바로 세우고, 결단하여 자유와 평화를 이루는 존재론적 의의를 구현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인격을 세우고, 그야말로 국격(國格)을 정립하는 길이다.

진정 6.25동이에게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평화이다. 나도 모르게 태어난 시점에 겪었던 전쟁의 상흔을 또 다시 다음 세대가 자신도 모르게 태어나면서 그 업보를 떠안게는 만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6.25동이의 환갑이 ‘절망의 환갑’이 아닌 ‘생명과 평화의 환갑’이 되도록 만들어줄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를 묻고 싶다.

변진흥 (가톨릭대 김수환추기경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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