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

지난 5월 10일 엄기호 연구위원의 특강 “용산, 제주에서 4대강까지…왜 다시 종교인가? - 속물들의 시대에서 가톨릭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를 들었다(강의 개요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www.catholicnews.co.kr에서 볼 수 있다. 고동주, “넘쳐나는 속물들, 왜 성직자 운동만 확대되는가?”). 모두 공감 가는 이야기였지만, 특별히 2년 전 촛불시민에 대한 분석이 마음에 남았다.

"운동권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지만, 민주주의가 당장 여기서 실현될 거라고 믿지는 않았어요. 촛불시민은 달랐죠. 그들은 민주주의가 당장 여기서 실현될 수 있다, 실현되어야 한다고 정말로 믿었어요. 그러니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새벽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새워 민주주의를 외치고 요구한 거예요. 새로운 가톨릭운동은 촛불시민처럼 무언가를 정말로 믿을 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엄기호 연구위원의 말을 들으며 내가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정말로 믿기에 내 모든 존재를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는 그것이 있는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떠오르지 않았다. 이틀 동안 틈나는 대로 내가 정말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지만, 생각이 계속 흩어졌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 갑자기 마르코복음 1장 15절이 떠올랐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스승 예수가 목숨 걸고 실천했던 믿음, 하느님나라. 그게 바로 나의 믿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은 당위일 뿐, 정말 나는 예수처럼 목숨 걸고 ‘때가 다 되어 하느님나라가 다가옴’을 믿는가? 그 믿음을 바탕으로, 이 복음을 믿기 위해서 회개하고 있는가? 자신 있게,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지난해 이제민 신부의 강좌를 6주 동안 부산에서 열었다. 첫 강의 때 이제민 신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마르코복음 1장 15절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에요. 신자들이 묵주기도하면서 성모송을 몇 십 번 하는 것보다 이 성경구절을 되풀이해서 외우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이 구절을 떼제 성가처럼 짧은 성가로 만들어서 되풀이해서 부르면 더 좋겠죠."

이제민 신부의 생각을 김정식 연구위원에게 전했더니 며칠 만에 노래 <기쁜 소식>(아래 악보. 다음카페 “김정식 로제의 노래” (http://cafe.daum.net/rogerio) 의 ‘김정식 로제 생활성가’ 게시판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다.)을 만들었다.

마르코복음 1장 15절은 복음서의 핵심이고 우리 믿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는 세례 받는 신자에게 예수의 믿음을 묻지 않는다.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으니 하느님께 돌아가서 하느님 뜻대로만 살겠느냐고 묻지 않는다. 대신 사도신경의 믿음을 묻는다.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핵심교리를 간추린 신앙고백문이다. 이 믿음이 과연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공감되고 있을까? 신자들은 이 고백을 정말 믿는가? 나는 사도신경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리저리 읽고 들은 게 많아질수록 더 그렇다. 그 안에는 교리가 있을 뿐, 우리가 믿고 살아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예수가 믿으라고 한 하느님나라 가치는 사도신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하느님나라가 지금 당장 여기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 하느님나라가 우리 삶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음과 몸으로 깨우칠 수 있을까? 그 믿음을 진짜로 살 수 있을까? 그 믿음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이 물음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보일 때, 우리신학연구소가 새롭게 가려는 길도 조금은 밝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기쁜소식' 김정식 노래/작곡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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