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산책-박영대]

두 종류 인간

몇 년 전 나는 중국 베이징에 있는 한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하였다. 우리신학연구소가 주관한 중국천주교회 방문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정신지체장애인시설이었는데, 실무책임자가격인 한 젊은 남성이 자기네는 이 시설을 공동체 방식으로 운영하고자 노력한다고 소개하였다. 설명과 질의응답이 진행되는 동안 온 마음을 실어서 우리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참 맑은 기운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 물었다. “공동체 방식으로 운영한다는 게 어떤 것인가요?” 그는 이렇게 저렇게 운영한다고 대답하지 않고, “그것이 우리가 날마다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머리가 쭈뼛할 정도로 감동하였다. 질의응답이 끝나고 차 대접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시설을 둘러볼 때,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이 시설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널리 퍼진 그룹홈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한 후배랑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배울 줄 아는 사람과 배우지 못하는 사람.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과 생각에 맞추려고 하고, 배울 줄 아는 사람은 얼핏 보아 비슷한 것에서도 새로움을 찾아내고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절실한 ‘하기’를 통한 배움

어제 류상태 목사의 <소설 콘스탄티누스> 읽기를 마쳤다.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인되고 제국 종교가 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다. 이른바 ‘대광고 강의석군 사건’을 계기로 20년 동안 머물러 온 대광고등학교 교목직을 버리고 목사직도 교단에 반납한 그가 소설가로 변신한 까닭은 이렇다.

“저는 기독교가 언제, 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과 같은 배타적인 종교가 되었는지를 혼신의 힘을 다해 세상에 증언하고 싶었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팩션’이라는 장르를 선택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의 정통 교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매우 다르며, 로마 황제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다는 점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쓰인 기독교 역사소설로, 사실에 기초해서 이야기를 꾸미고 해석한 실화소설입니다.”(저자 후기, 368쪽)

결국 그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기 생각을 나누는 좋은 방편으로서 소설을 선택한 셈이다. 소설 쓰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던 류 목사가 소설 쓰기를 위해 한 공부는 단순했다.

“소설의 감각을 습득하기 위해 여러 차례 반복해서 조정래 선생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시리즈와 황석영 선생님의 <바리데기>, 김훈 선생님의 <남한산성>, 덴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등을 통해 좋은 영감을 받았습니다.”(저자 후기, 372쪽)

이처럼 그는 소설 쓰기를 위해 정성껏 좋은 소설을 읽었고 영감을 받았다. 진정한 배움은 절실할 때 ‘하기’(Doing)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진정한 배움은 기술이나 방법을 익히는 게 아니라 영감을 얻는 데 있다.

수행은 일상을 낯설게 살기

지난 4월 5일부터 12일까지 네팔 여행을 다녀왔다. 과거 우리신학연구소 이사장을 지냈고 지금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사장인 홍성훈 선생님이 모든 비용을 대며 양쪽 상근자와 관계자 11명을 초대하신 여행이었다. 나로서는 두 번째 네팔 여행이었다. 첫 여행 때는 막 사진에 취미를 붙이던 때였기도 했겠지만, 낯선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댔는데, 이번에는 줄곧 시큰둥했다. 풍광이 첫 번째만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두 번째니만큼 익숙한 점이 많았다.

누구나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생각의 습관, 몸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사람을 성숙, 성장시키는 좋은 프로그램이다.

수행은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몸과 마음의 습관에서 벗어나 늘 깨어있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스승 예수의 말씀도 우리에게 일상 삶 안에서 깨어 있으라고, 수행하라고 요구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4-36)

경계에 서 있는 공동체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6-47ㄱ)

스승 예수를 따르려는 제자공동체는 유대교 경계에 있었다. 유대교 성전에 모였지만, 거기에 속하고 머무르지 지 않고 스승 예수를 따라 즐겁고 순박한 밥상공동체를 마련하였다. 류상태 목사가 소설을 통해 말한 것처럼 기독교 변질의 외부 요인이 로마 종교화라고 한다면, 내부 요인은 그보다 훨씬 앞서 일어난 밥상공동체의 상실(1코린 11,17-34 참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우리신학연구소는 새 길 찾기에 나섰다. 이 새 길 찾기를 통해 내가 벗들과 함께 이루고 싶은 공동체는 즐겁고 순박한 밥상이 살아있는 공동체, 일상 삶에서 수행하는 공동체, 모두가 절실한 ‘하기’를 통해 늘 배우는 공동체이다. 지금 교회의 경계에서 나처럼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5백만 명 신자 가운데 1%인 5만 명? 0.1%인 5천 명? 그들을 만나고 싶다.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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