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새해, 무엇을 꿈꿀까

한 교회 언론이 '시노달리타스, 성직주의 성찰과 나눔'을 주제로 대담을 마련했다. 연초에 이뤄진 것이고 딱딱한 자리도 아니었으니 ‘신년정담’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 10월 로마에서 열린 시노드에 대해 한국 교회에서 이렇다 할 반응이나 움직임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오는 10월에 열리는 2차 시노드까지 교회 지도자들과 하느님 백성 전체의 관심이 아주 필요한 시점임을 고려할 때 적절한 기획이었다고 생각된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 세 명이 서로의 관점에서 ‘공동협의성’(synodality)과 성직주의에 대해 솔직하고 격의 없는 태도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한 이 자리는 꼭 있었어야 할, 그러나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그 무엇을 기억나게 하는 듯했다. 20여 일이 지난 현재까지 달린 댓글을 보면 대담 내용에 대해 부정보다는 긍정의 반응이 많았다. 이를테면 출연한 사제가 평신도에게 많은 자율성을 부여해 온 평소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라는 칭찬이나, 이런 자리처럼 수평적으로 이야기하는 자리가 교회에 필요하다는 지적, 또 평신도 패널의 말에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는 평을 나눠 주었다. 그중 자신을 ‘20년을 냉담하다가 돌아온’ 신자라고 소개한 한 댓글에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회가 ‘말만 하고 바뀌지는 않는 게 참 안타깝다’며 시대에 맞는 변화를 주문한 대목을 곱씹어 본다.

바뀌지 않는 것 가운데 특히 ‘성스러움’과 ‘속됨’이라는 이원론은 참으로 그 명이 긴 듯하다. 내가 보기에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성스러운’ 성당과 성직자에 비해, 세속에 있는 가정과 일터에서 머무는 ‘속된’ 평신도라는 관념을 가속화, 공고화하는 방향으로 교회 삶이 조직되어 왔고 그 결과의 하나로 여전히 성직중심주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이 대담에서도 ‘목자와 양’이라는 비유를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는 점은 살짝 아쉽다. 이 비유는 2000년 전 팔레스타인이라는 시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지, 현대로 그대로 가져와 적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분명 ‘하느님 말씀’이지만 불가피하게 인간의 손을 거친 것이니 역사성, 곧 시대적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를 현대적 상상력과 언어로 재해석, 재언어화 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더 절실하고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만약 그걸 해낼 능력이 없다면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원하는 현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질 것이다. 한국의 한 토착종교가 가르치듯이 성직자냐 평신도냐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지자본위’(智者本位)에 따라 집단이 이끌어져야 한다. 여기서 지자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가 많은, 노동이나 삶의 경험, 또는 실천적 지식에서 오는 그런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성직자-목자’, ‘평신도-양’이라는 이분법적이며 수직적인 교회 관습과 문화를 표상하는 목자와 양 비유는 마땅히 억제하는 방향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2023년 9월, 게오르크 베칭 주교가 강론하고 있는 모습. (이미지 출처 = DOMRADIO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2023년 9월, 게오르크 베칭 주교가 강론하고 있는 모습. (이미지 출처 = DOMRADIO가 유튜브 채널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베칭 주교와 세계주교시노드

학술회의나 대담이 아니라 그랬는지 성직중심주의를 교회구조 개혁이라는 구조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은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 정담이 ‘성직자도 평신도도 모두 책임이 있다’는 양비양시론의 태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문제를 구조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결국 성직주의는 개인의 도덕이나 인격 문제로 귀결되고 그것을 양산하는 제도나 체계의 모순은 은폐되기 십상이다. 이와 관련해 독일주교회의 의장 게오르크 베칭 주교가 지난해 10월 로마에서 열린 세계주교시노드에 대해 말한 내용은 여기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베칭 주교는 시노드가 충분히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서 2024년에 열리는 시노드에 더 용기를 내기를 희망했다. 아마도 이런 평가는 ‘더 많은 연구’가 요구된다는 여지를 남기기는 했지만, 특히 여성 사제에 관해 언급조차 없었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개인 견해라는 것을 전제로 ‘의무 사제독신제 폐지와 여성 사제서품을 허용해야 한다’1)고 밝혔다. 나아가 독일 전국 단위의 시노드를 만들어 평신도와 주교가 동등한 수로 대표하여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성직중심주의와 성직자의 성학대가 동전의 양면이고, 이는 개인의 도덕성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제도나 구조를 확립하거나 개혁함으로써 개선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는 베칭 주교의 파트너인 ‘독일 가톨릭중앙위원회’(ZdK)의 평가에서도 강조된다. 평신도의 대표조직인 중앙위원회는 시노드 결과를 조심스럽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성적 학대를 사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인식한 것으로 보았다.’2)

교회 개혁과 관련해 시노드 최종보고서도 2022년 3월에 발표한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를 반복함으로써 교황청 구조 개혁을 향한 전 교회 차원의 동의 절차와 결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고서는 ‘친교의 삶’과 ‘건강한 분권화’를 개혁의 바탕으로 본다고 밝혔는데,3) 사실 이는 한국 교회를 포함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지역 교회에서도 시급히 요구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당(성당)에서 교구, 또 전국 주교회의에 이르기까지 권력이 성직(자)에 과도하게 편중되어 있고, 그 결과 하느님 백성 사이의 평등한 친교는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황령을 통해 교회법을 개정하고자 하는 의도는 종합보고서에서도 읽힌다. 보고서는 “지금은 폭넓은 교회법 개정이 요구된다”4)면서 ‘각 성당과 교구에서 사목평의회(Pastoral Council)가 의무화되어야 함이 요구된다’5)고 밝히고 있다. 이는 동방 교회와 같은 ‘이웃한’ 교회를 염두에 둔 대목이지만, 베칭 주교의 관점을 제안 삼아 좀 더 발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곧 본당과 교구에 설치된 기존의 사목회나 참사회를 본당 사제의 취향이나 소수의 참사들과 주교만이 모여 결정하는 형태가 아니라, 명실공히 평신도가 광범위하고 왕성하게 참여해 정책을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공식 틀로, 또 전국 차원의 주교회의에서도 앞서 베칭 주교가 언급했듯이 평신도와 성직자가 동일한 수로 평등하게 참가하는 ‘전국 사목총회’ 형태로 재창조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를 아시아 교회의 처지에서 생각해 본다.

2009년 5월 우리신학연구소는 ‘국제 가톨릭 지식인문화운동’(ICMICA)과 함께 서울에서 '성체와 아시아 공동체-모든 벽을 넘어'를 주제로 열었다. 이 포럼에는 주교 2명과 전현직 FABC 임원을 포함해 아시아 11개 나라에서 8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 제공 = 황경훈)
2009년 5월 우리신학연구소는 ‘국제 가톨릭 지식인문화운동’(ICMICA)과 함께 서울에서 '성체와 아시아 공동체-모든 벽을 넘어'를 주제로 열었다. 이 포럼에는 주교 2명과 전현직 FABC 임원을 포함해 아시아 11개 나라에서 8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 제공 = 황경훈)

아시아 교회와 2024년 시노드

지난주에는 타이 치앙마이에 있는 ‘국제청년교육센터’(IYTC) 주최로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와 이후 전망에 대해서 FABC 사무차장 윌리엄 라루스 신부가 발제하고 여러 패널들이 논평을 하는 온라인 세미나 자리를 마련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FABC 창립 50주년 총회 최종문헌을 소개하고 그 의미를 짚어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1시간이 넘는 그 발표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진 것은 시간 길이 때문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남북한 통일과 관련해 ‘화해와 용서’를 말하면서도 ‘화해의 대상은 누구이고 용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빼먹은 맥락 없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듣는 처지와 비슷했다. 그런데도 이 FABC 총회 문건이 ‘매우 도전적(challenging)’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하는 데서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모호함이 15년 전의 기억을 소환했다. 2009년 당시 한국에 윌리엄 신부를 포함해 전·현직 FABC 관계자와 활동가, 신학자들을 초청해서 규모 있는 신학 컨퍼런스를 열었을 때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겪었다. 윌리엄 신부는 사석에서 내게 ‘이 컨퍼런스에는 신학이 부족하다’며 묻지도 않은 일종의 인상평을 전했다. 신학 포럼에 신학이 부족하다니 이게 뭔 소리인가? 필리핀의 ‘투쟁의 신학’(theology of struggle)을 말하는 활동가의 발표 내용이 너무 투쟁적이어서 그런 것인가, 아님 베다와 우파니샤드, 샹키아의 불이론(不二論, advita)과 라마누자(Ramanuja)의 신애(神愛, Bhakti) 사상을 넘나드는 인도의 토착화 내지는 다종교 신학이 너무 많아서, 너무 현란해서 그런 것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에는 안개처럼 뿌옇던 그 궁금증의 실마리를 이번에 그의 발제를 들으면서 찾게 되었다. 그러니까 FABC 문헌 중 역대급으로 피상적이고 전망도 거의 보이지 않는 문건이6) 그에게 ‘도전적’인 것은 아마도 그와 나의 ‘신학’에 대한 생각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인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어쨌든 FABC와 관련한 내 논평이 끝나자 윌리엄 신부는 답변으로 ‘FABC는 실행기구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답했고, 이에 또 한번 발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90년대 FABC 산하 ‘인간발전사무국’(OHD)은 여러 주교의 교육과 연수를 마련했고, 특히 그 가운데 ‘사회행동 아시아 연수’(AISA)는 ‘공동협력성’의 정신과 조직 구성 면에서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이 연수에는 주교만이 아니라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모여 분석하고 논의하며 실천을 함께 모색하는 자리였으며 이는 FABC의 주도로 실행된 것으로, 이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필요가 있지 않냐는 지적도 덧붙였다. 이어 2019년에 열린 ‘아마존 시노드’처럼 아시아에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이,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 나라들을 중심으로 인구 및 지역 분포상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토착원주민’의 종교문화 전통 보호를 위해 ‘아시아 토착원주민 전통과 생태계 보호를 위한 동남아시아 시노드’를 열자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예의 AISA를 벤치마킹하여 ‘시노드 실천 아시아연수’(Asian Institute for Synodal Action)라는 또 하나의 AISA를 FABC와 평신도가 함께 조직함으로써 ‘아시아 토착민 시노드’를 아시아 전체 하느님 백성의 이름으로 준비해 가자고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이 제안에 호응이든 비판이든 어떤 반응이나 움직임이 나온다면 반갑고 희망찬 새해가 될 것 같다.

1) 경동현, '독일 교회에서 바라본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23.12.13.
2) 위의 글.
3) XVI Ordinary General Assembly of the Synod of Bishops First Session (4-29 October 2023), Synthesis Report A Synodal Church in Mission, 13. c.
4) Ibid. 1.r.
5) Ibid. 12.k.
6) 편집국,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50주년, 비전이 없다', 펠릭스 윌프레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23.05.31. 이 글은 어쩌면 펠릭스 윌프레드 자신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아시아 신학자이기도 하지만 1990년대 FABC 신학사무국(OTC)의 사무총장을 두 번이나 지내며 FABC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던, 지금도 고민하는 인물로 일종의 자기부정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독을 권한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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