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읽은 어느 신부님의 글이 가끔씩 내 마음에 떠오른다. 그 신부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항상 백 프로의 힘을 쓰며 살 수는 없다는 것. 그랬다간 오래지 않아 지친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은 평소에 80프로의 힘으로 생활하다 백 프로가 필요할 땐 그 힘을 쓰고 일이 끝나면 다시 80프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려서부터 항상 최선을 다해 살 것을 요구받는다. 요샌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 어릴 땐 모든 초등학교 아이들의 목표가 서울대였다. 당시 서울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위 1퍼센트에 들어가야 했는데 100대 1의 경쟁률에서 그 1이 되기 위해 기울여야 할 노력이 얼마나 크겠는가. 당연히 모든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강요받았고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나보고 백 명 중 한 명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굉장한 부담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아이에게 백 명 중 한 명이 될 거를 요구하는 게 얼마나 부당하고 무리한 요구인지를 당시 우리들은 알지 못했다.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채점한 시험지를 나눠 주며 빵점을 맞은 친구를 나무라자 책상에 엎드려 울었던 여자아이가 생각난다. 당시 교실 분위기는 도대체 빵점을 맞는다는 게 가능한 건가 하는 의뭉스런 것이었는데, 모두 백점을 맞고 싶어 하는 불가능한 욕구가 팽배한 가운데 그 아이는 마치 이미 낙오자처럼 여겨졌다.

항상 최선을 다해 살라는 요구는 공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적에 따라 대학이 결정되고 직업이 결정되는 한국 사회에서 가난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고정관념이 우리 마음을 씁쓸하게 만든다. 국영수 잘하는 게 이후 경제 수준을 결정지어 버리는 건 건강하지 못한 사회의 아주 큰 일면이다. 반드시 고쳐야 하는 사회적 병폐라고 생각하는데, 이 문제는 아주 강고한 기득권층과 직결되어 있어 부동산 문제 다음으로 고치기 어려운 문제일 게다.

서울대를 나온 아버지와 서울교대 영어교육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어머니, 그리고 서울대에 들어간 형을 둔 나는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지만 스카이 대학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성적에 많이(?) 연연하지 않는 부모님을 만났고 더욱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삶의 방식인 사제가 되었다. 하지만, 인정 욕구가 강했던 나의 신념 체계에는 더더더가 항상 붙어 있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가 계속 필요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어느 순간 더 나은 내가 되어도 더 더 나은 나를 추구해서 결국 만족이란 건 없겠다는 깨달음이 왔는데, 그건 진정한 그것이 아니었고 계속 전진해야만 하는 나를 가끔씩 불러 세우는 역할밖에 못했다. 이런 내가 어느 책에서 읽은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인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라는 요청을 제대로 이해할 리가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뭬야?

사실, 그 ‘있는 그대로’는 신부가 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제대로 깨달으려면 한참 시간이 걸린다는 걸 지금은 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앎은 체험적 지식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즉, 본인이 체험해 보고 그렇게 살아 봐야 이해할 수 있는 앎인 게다.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예로 주님께 의지하기가 있다. 본인이 의지하는 훈련을 안 해 본 사람은 남한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지가 않다. 안해 봤기에 그렇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암튼 신학생 때 접한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 채 좋은 신부가 되려는 나의 목표는 더 많은 것을 잘해 내려는 욕구로 연결됐고 내 삶이 그렇든 안 그렇든 간에 너무 잘하려는 내가 되곤 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살게 되면 삶에 별로 여유가 없고 때로 지치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백프로의 힘을 내내 쓰려고 하기 때문인데 진짜 문제는 이게 최선의 결과를 내오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생각해 보자. 살면서 항상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있나.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 보지를 못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만을 보지는 않는다. 어느 목사님 얘긴데 그분은 돈을 밝히지도 않고 성도들을 정성껏 섬기며 정말 잘 사는 목사였지만 설교 내용이 나처럼 살라는 메시지를 계속 주는 바람에 성도들로 하여금 부담감을 계속 느끼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독야청청 부류에 속해서 정말 열심히 산다는 말을 듣기는 해도 진정한 존경을 받지는 못한다. 비슷한 경우로 일중독이 있는데 겉으로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일을 할 때만 자기 존재감을 느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빠져들어 그 외에 소중한 것들을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하기 쉽다.

이처럼 모든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라는 말은 우리를 불가능한 목표로 이끌어서 끝내 우리를 좌절하게 만든다. 차라리 80퍼센트의 힘으로 일상을 살다 100퍼센트를 발휘해야 할 때를 잘 구분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생각한다. 불가능한 목표에 도달하려고 애쓰게 되면 그렇지 못한 경우를 자주 체험하므로 우리는 항상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이에 대비되는 만족감이나 보람은 오래 가지 못하고 자신이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잘한 것보다는 잘 못한 것이 더 생각나고 실수나 잘못에 예민해진다. 결국, 전체 삶의 에너지가 나이를 먹을수록 고갈되기 쉽고 일중독이나 다른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80퍼센트의 힘으로 산다는 건 일단 너무 잘하려는 마음에서 너무를 빼는 것이다. 누구나 잘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너무 잘하려는 건 항상 100퍼센트를 발휘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라 틀림없이 무리가 온다. 적당한 긴장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80퍼센트의 마음가짐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머지 20퍼센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우리의 부족함이나 한계, 실수와 잘못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 삶엔 여유가 찾아오고 나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남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실수나 잘못을 용납하지 않는 곳은 얼마나 삭막하겠는가.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항상 100퍼센트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100퍼센트를 발휘해야 할 때가 있지만 절대 항상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80퍼센트의 일상이 적당히 사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그리고 100퍼센트의 에너지를 썼는데 결과가 바라는 것보다 좋지 않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바로 80퍼센트의 가치관이 아닐까 싶다.

현우석 신부

의정부교구 상담 전담 신부입니다. 교구청 옆 주교좌 성당에서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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