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매달 두 번째 금요일에 '현 신부의 이거나 저거나'를 연재합니다. 정답이 없는 삶에서 우리네 삶에 풍요로운 선택이 있음을 사목 단상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집필해 주신 현우석 신부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혹자는 정답은 없지만 모범 답안은 있다고 하는데, 나 학생 때 정답을 모범 답안이라고 바꿔 부른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게 그거인 것처럼 느껴진다. 암튼 정답이 없다 함은 확답이 없다는 얘기인데 일견 수긍하면서도 살아오면서 더욱더 정확한 답을 찾아내고 그렇게 살기 위해 애를 썼던 나 자신을 떠올려 보면 그게 참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었음을 지금은 안다.

신부가 되고 나서 제일 신경이 쓰였던 일은 여름캠프였다. 초등부, 중고등부의 제일 큰 행사이자 일년 농사의 꽃이나 열매라고 할 수 있고, 그만큼 교사들은 물론이고 학생들과 얼굴을 가장 자주, 많이 보는 시기였다. 내게 있어 좋은 캠프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프로그램의 준비와 운영이었다. 거기에는 아주 환상적인 캠프의 이미지가 있었고 현실은 그와 많이 동떨어져 있었지만 어떻게든 그 목표에 더 가까이 가는 게 중요했다.

자연스럽게 매년 캠프가 다가오면 난 은근 스트레스를 받게 됐고 캠프 직전까지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끝나면 시원섭섭해 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좋은 캠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생각만이라도 말이다) 나 자신도 주일학교 초등부부터 사제가 되기까지 수십 번 캠프를 다녀오고 접했으니 눈높이는 한껏 높아져 있는데, 베테랑 교사 한 명 정도 빼고는 이제 한두 번 캠프 경험을 해 본 교사들을 데리고 원하는 캠프를 해낸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불가능한 목표였다. 결론은 내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늘 지닌 채 일했다는 거였다. 교사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더 많은 가르침을 줄수록 더 좋은 캠프가 준비돼서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행복해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당연히 일은 기대만큼 되지 않았고 늘 약간의 불안감과 때로는 조바심도 함께 가지고 있게 되었다. 내 딴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같은 일에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현실은 어떻든 간에 너무 잘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피곤은 계속 쌓여 갔고 캠프 가서 교사들이 결정적 실수나 잘못을 할 때 화가 나서 참느라고 무진 애를 쓴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해를 넘겨가며 경험도 쌓이고 노하우도 늘었지만 내가 알게 모르게 정해 놓은 목표에 가까이 가고 있다고 느끼기보다는 이룬 것만큼 그 목표는 더 멀리 가 있었고 현실은 늘 부족한 것 투성이였다. 물론, 10년 차가 되자 눈에 띄는 성과도 이루어 내고 교사들과도 더욱 친밀해져 보람도 더 생겼다. 하지만 캠프에 임하는(어디 캠프만이겠는가만) 내 마음가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건 7년 차쯤 되는 해 중고등부를 맡은 선배 신부를 통해서였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지금여기 자료사진

선배는 교사들이 스스로의 실수나 잘못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더 많이, 더 확실히 배울 수 있다는 걸 내게 가르쳐 주었다. 지도신부의 의견이 백 퍼센트 관철되는 것도 교사 양성의 관점에선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교사들이 실수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필요한 게다. 캠프는 아이들도 자라고 교사들도 성장하는 그런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선배의 관점을 받아들이자 난 좀 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될 수 있으면 모든 걸 내 관점에서 통제(?)하고 싶어 했는데 어느 정도 뻔히 부족한 결과가 나올 걸 예상하면서도 교사들의 의견대로 해 보게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내 자신이 ‘내 말대로 해’ 스타일이 아니긴 하지만 속마음은 진배 다름없었으므로 속으로 답답해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회의 때 내 의견을 말하면서도 교사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그에 따른 결과를 교사들이 직접 깨달을 수 있는 체험을 하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 괜히 쓰는 말이 아닌 거다. 그 후부터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캠프를 위한 준비에 얽매여 긴장하고 조급한 마음이 되는 것보다는 어떤 선택을 하던 장단점이 다 있게 마련이며, 결과에 큰 차이가 안 난다는 생각이 내게 어느 정도 여유를 주었다.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이런 말이 첫째 장에 나온다. "부족함은 존재의 일부이다." 굳이 이 말의 의미가 잘 안 와닿더라도 우리 사람이 완전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은연 중에 완전해지려는 게 문제다. 아니, 완전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완전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부족한 존재라는 걸 알지만 그건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왕이면 완전해지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실수나 잘못을 하게 되니 참 아쉽다는 뉘앙스인 거다. 위의 말에 나오는 존재의 일부로서의 부족함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별로 안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부족함을 냅두라는 얘긴 아니다. 오히려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덜 긴장하게 돼서 성숙함에 더 가까워지는 효과가 나는 게다.

신부들 중에는 강론 준비를 어려워하는 이들이 있다. 내 동기 중에는 두 명이나 강론을 보름 전에 미리 쓰는 인간까지 있을 정도다. 교우 관계 다음으로 강론 준비가 어렵다는 설문조사가 예전에 나왔는데 나도 충분히 이해 가는 바다. 어떻게 보면 수십, 수백 명을 앞에 앉혀 놓고 십 분 가까운 시간을 잘하나 못하나 판단받는 자리이니 신경이 안 쓰인다면 그게 이상하겠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다른 글을 쓸 때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신부가 되고 나서 이렇게 내적인 감정과 심리를 글로 표현한 적이 처음이라 어떻게 읽힐까 좀 불안했나 보다.

사실, 누구나 남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고 실수나 잘못하지 않으려고 나름 애쓰는데, 그런 면에 신경을 많이 쓸수록 에너지는 소모적이 되어버리기 쉽고 결과도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게 된다. 운동선수들한테 어깨에 힘을 빼라는 얘기는 경직되지 말라는 의미인데 어깨에 힘을 주는 것부터가 벌써 쓸데없는 곳에 힘을 주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잘하려고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런 모습을 하게 되는 건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오니 이건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니다.

잘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은 누구나 갖고 있고 그걸 없앨 필요는 없다. 정작 문제는 ‘너무’ 잘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너무를 빼야 한다. 너무는 우리를 쓸데없는 긴장 상태로 빠뜨리고 과하게 들어간 힘만큼 결과도 나오지 않게 만든다. 큰 차이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나름 충실히 노력한 후 나오는 선택에 따른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큰 차이는 안 났을 테니까.

현우석 신부

의정부교구 상담 전담 신부입니다. 교구청 옆 주교좌 성당에서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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