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격월 세 번째 월요일에 '길, 산, 사람, 강'을 한 해 동안 연재합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활동가로서 길 위에서, 세상 안에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엮어 갑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오현화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저녁 어스름에 막내를 데리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건널목 건너편에 누군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어찌나 크게 울부짖고 있는지 그 소리가 길 건너까지도 쨍쨍하게 들렸다. 꺼이꺼이 우는 소리를 들으니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겁이 덜컥 났다. 저만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난동을 부리면 어쩌나 지레짐작하며 길을 돌아서 가야 하나 갈팡질팡했다. 그사이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길을 건너서야 아이가 울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엄마! 누가 울고 있어요!”, “어어, 그래그래” 대충 대답하면서 ‘대체 왜 사람들이 저 사람을 계속 내버려 두는 건가, 멀쩡한 사람이 대체 왜 저러고 있는가, 우리한테 달려들면 어쩌나’ 밀려오는 걱정으로 머리가 아팠다. “저 사람은 왜 우는 거예요?”라는 아이의 질문에, “그러게, 나도 모르겠네.... 왜 그럴까”라고 대답을 회피하며 아이 손을 꼭 잡고 서둘러 여자를 스쳐 지나갔다. 악을 쓰며 서럽게 우는 여자를 지나쳐 한 발짝 내딛는 그 순간, 내 손을 잡은 아이가 우뚝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수님이라면 저 사람을 위로해 줬을 거예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맙소사, 하느님, 저는 이제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부끄러움으로 덜덜 떨며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엄마가 지금이라도 물어볼까? 아니, 물어볼게.” 몸을 돌리려 하자 아이는 다시 내 손을 꼭 잡고 단호히 이야기했다. “아니에요, 엄마, 괜찮아요, 가도 괜찮아요. 예수님께서 저 사람을 위로해 줄 사람을 보내주실 거예요. 엄마, 괜찮아요.” 아이는 굳어버린 나를 토닥였다. 머뭇거리는 나의 손을 조물조물하며 괜찮다, 괜찮다 말을 반복했다.

“이 누이가 지금 울부짖고 있습니다.” ('찬미받으소서' 2항)

지구가 울부짖고, 가난한 이들이 부르짖고 있다. 실재하는 그 소리를 나는, 우리는 얼마나 '듣고' 있는가. 나는 멀리 있는 북극곰과 뱃속에 플라스틱이 가득 차 죽은 알바트로스를 막연히 동정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가까운 현장에서, 환경부 앞에서, 갯벌에서 ,강가에서, 심지어 내 발로 아직 가 보지 못한 땅의 자락에서 외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있다. 아니 연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까지 걸어온 길 위에서 나는 과연 그 부르짖음을 제대로 '듣고' 있었는지 물어보니 자신이 없다. 숙제처럼 손팻말을 들기도 하고, 기자회견 발언문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서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다. 어쩌다 가끔 나를 포함한 인간의 문명이 하느님의 피조물에 못질하는 파괴의 현장 증인이 되어 아파하긴 했지만, 그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고통을 끌어안으며 일치하는 연대는 하지 못했다. 문제가 너무 많고, 화낼 일이 너무 많았다.

지난 10월, 광화문광장에서. (사진 제공 = 오현화)
지난 10월, 광화문광장에서. (사진 제공 = 오현화)

우리가 모든 것에 아파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분노나 짜증이 아닌 다른 감정이 얼마나 운동의 동력이 되는가 생각해 보자. 일회용품 규제를 풀어버리는 정부의 결정과 화석연료 퇴출에 미적거리는 국제사회에 분노하지만, 그 때문에 아파하진 않는다. 고통에 공감하기엔 때로 일이 너무 많고, 갈 길이 멀어 서둘러야 하기에 다른 감정은 살짝 접어두고 우리는 다음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일어난다. 혹은 외면한다. 활동을 너무 많이 하던, 하지 않던, 고통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은 당사자 스스로 맡겨진다. 공동의 집도, 가난한 이도 알아서 부르짖고, 알아서 스스로 위로하게 내버려 두게 된다.

한편으로 매일 한숨 나오는 새 소식들과 몰려드는 서명 운동에 급하게 손가락만 놀리며 무뎌지는 나와 우리 자신을 생각한다. 일은 할수록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는데, 발전이나 개선은커녕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힘들다. 모든 것을 하려고 애썼는데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아닌가 고개를 떨구는 순간, 냉소와 소진이 그 자리를 슬그머니 채우면서 또 다른 분노가 밀려온다. 그런 나와 이웃들에게 우리는 서로 얼마나 위로하고 격려하였는가.

할 일이 산처럼 많아서 갈 길이 바쁜 지금, 바로 그 이유로, 역설적으로 우리에게는 분노를 넘어 돌봄이 필요하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돌봄이. 돌봄은 드러나지도 않고 체계적인 구조로 되어 있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어 사랑을 받고, 또 주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에 돌봄을 향해 갈 수 있다. 열심히 달려가는 자신 혹은 실망스러운 자신을 토닥이자. 부지런히 활동하는 이웃도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웃도 토닥이자. 그리고 풍요로운 땅과 이미 문명으로 숨이 막혀 있는 땅을 토닥이자. 침묵 속에서 하느님이 나에게 ‘괜찮다’ 하시는 소리에 가만히 마음을 열자. 이 모든 관계가 회복되면서 귀가 열려 다른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고 그 부르짖음의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

이는 한가하게 노닥거리는 것이 아니다. Festina Lente! (빠르게 천천히! 급할수록 돌아가라) 서둘러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진정 한 발짝을 내디딜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그 역설의 발걸음을 알고 있다. 백마를 탄 왕이 아닌 아기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그러기에 우리는 이 대림·성탄 시기에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차 다시금 서로를 토닥이며 진정으로 ‘듣고’ 일치하여 나아간다. 길 한가운데에서 울부짖는 여인을 위로하고, 그를 지나쳐 허둥거리는 엄마를 위로하고, 활동에 지친 이들, 가난한 이들과 땅을 위로하며 동방박사들처럼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나아간다. 이것이 우리의 발걸음이고 우리의 행동이 지향하는 바다. 주님, 찬미 받으소서!

자기 전에 아이에게 아까 울던 사람을 위해 함께 기도하겠냐고 물었다. 아주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주섬주섬 묵주를 꺼내 왔다. 졸려서 1단만 바치고 웅얼거리며 간절히 기도를 바치고 잠들었다. “주님, 그 사람이 울지 않고 행복하게 해 주세요. 밥도 먹고 잠도 잘 자게 해 주세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나도 옆에서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를 통하여 저희의 찬미와 감사를 일깨워 주소서. 존재하는 모든 것과 친밀한 일치를 느끼도록 저희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

오현화

가톨릭기후행동 공동대표, 마을 활동가, 세 아이 엄마.

매일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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