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출처 = NCR)

(대니얼 호런)

프란치스코 교종이 지난 4일 발표한 교종 권고 ‘하느님을 찬미하여라’(Laudate Deum)는 지금 우리가 전 지구적 재난에 직면한 수준에 걸맞는 강한 강도로 “선의를 지닌 모든 이에게 기후위기에 관하여” 호소하고 있다. 

이번 교종 권고는 지난 2015년 발표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e Si)의 요점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이 문서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현재의 기후 상태를 두고 “위기”라고 명확히 쓴 것은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2019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우리의 집에는 불이 붙은 상태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이 말을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 불이 났다고”라고 한 것이 맞다고 하는 듯 보인다.

툰베리는 그날 연설 좀 더 뒷부분에서는 들을 생각이 있는 모든 이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문명, 그리고 생물계 전체를 위협하는 기후 위기를 조금이라도 느끼는 이라면 누구나 명확한 언어로 이렇게 말해야만 할 역사상 한 시점에 서 있다. 즉, 그게 얼마나 불편하고 또 이윤이 안 나는 일일지라도 우리는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바꿔야만 한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여라’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툰베리의 호소에 응답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 문서 발표를 앞두고 일부에서는 이 문서가 제2의 ‘찬미받으소서’,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속편’이라고 했지만, 프란치스코 교종이 실제 발표한 것은 ‘찬미받으소서’ 보완과 갱신에 가까웠다. 그는 시작 부분에서 ‘찬미받으소서’는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는 일에 대한 자신의 진심 어린 걱정”을 공유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찬미받으소서’가 발표된 지 8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날이 갈수록 예상 피해는 더 커졌다.

그는 이렇게 썼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무너지고 있고 어쩌면 결정적 시점이 멀지 않은 이 상황에서, 나는 그간 우리의 대응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가능성에 더해, 기후 변화 영향이 많은 사람과 생명에 갈수록 더 악하게 끼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보건 분야, 고용 원천, 자원 접근, 주거, 강요된 이주에서 그 영향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뒤로는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하도록 열심히 촉구하는 호소가 이어진다. 그리고 진리와 신앙을 신학, 이론으로 옹호하는 변증이 이어진다. 후자에 관하자면, ‘찬미받으소서’는 초대 교회 신학자들 (예를 들어 2세기 리옹의 성 이레네오를 생각하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사항을 정교하게 옹호함으로써 문화, 종교적 회의주의나 적대감에 맞서려 했다. 이들 신학적 “변증자”들은 또한 당대 사회 최고 수준 지적, 문화 자원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논점을 제시하곤 하였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9년 4월, 성 베드로 광장에서의 일반알현 자리에서 스웨덴의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인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NCR)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9년 4월, 성 베드로 광장에서의 일반알현 자리에서 스웨덴의 기후활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인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NCR)

이번 교종 권고에서, 프란치스코 교종도 마찬가지로 그리한다. 그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2009년 노벨평화상 수상), 유엔환경계획(UNEP), 미국 해양대기청(NOAA)에서 명확하고 지적이며 과학적인 데이터를 인용한다. 그는 또 가톨릭교회 내부의 많은 훌륭한 자료도 인용하는데, 이전의 여러 교종 회칙, 성경, 그리고 당연한 것이지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저작 등이 그렇다.

‘하느님을 찬미하여라’의 톤이 얼마나 강한지, 프란치스코 교종은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이들을 정면으로 들이박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점들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느끼는바, 이는 (교종 권고 독자 눈에) 뚜렷이 보일 터, 내가 접하는, 심지어 가톨릭교회 내부 포함, 어떤 경박하고 거의 합리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의견들 때문이다.”

이 문서에는 예언자적 유발성이 뚜렷이 뿜어나며, 그리하여 호소이자 변증으로서 갖는 수사학 스타일이 더 강화된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언제나 세상을 실제 그대로 보면서(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시대의 징표”라고 표현한 것)도 동시에 하느님께서 세상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도 함께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예언자는 이러한 두 모습 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밝히고 청중에게 회개하고 변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것을 권고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떠한지 검토하는 데 많은 분량을 쓴 끝에 우리가 사는 “공동의 집”이 인간의 무관심과 “기술주의(technocratic)적 패러다임” 때문에 갈수록 환경이 나빠지고 있다고 규탄한다.

여러 예언자들이 내놓은 신탁이 그랬던 것처럼, 프란치스코 교종의 메시지는 권세 있는 자, 부유한 자, 안락한 삶을 누리는 자들의 화를 부추길 것이 확실하다. 지금 우리 시대의 상황에서, 기후위기가 심해지는 데 기여하는 여러 여건에서 큰 혜택을 받는 이들은 지구 북반부, 즉 선진국에 사는 이들이며, 특히 미국인들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미국 같은 나라 이름을 명시하며 이들이 부적절한 영향을 내고 있고, 그리하여 무언가를 해야 할 제 몫의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고 있다고 규탄한다.

"만약 미국에 사는 한 사람당 배출량이 중국에 사는 한 사람의 배출량보다 2배, 그리고 가장 가난한 나라 사람 평균의 7배라면, (미국 같은) 서구 모델과 연계된  무책임한 생활양식이 크게 변해야 장기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은, (그렇게 변한다는) 정치적 결정은 필수불가결하며, 그리해야만 우리가 서로 서로를 위한 진정한 돌봄으로 나아가는 길에 진전이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하나 자세히 말하듯, 불의한 현재 상태에서 혜택을 받는 이들은 늘 그렇듯 이러한 예언자 메시지에 불쾌해 하며 그 예언자를 침묵시키려 하는바, 왜 미국이 반 프란치스코 적대감의 중심지인지는 이로써 설명될지 모른다. (역자 주 : 미국 주교회의는 현재 반 프란치스코파의 강고한 요새며, 2015년에 ‘찬미받으소서’가 발표된 지 8년이 지났지만,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 가톨릭 신자 가운데 기후위기를 인정하는 비율은 거의 늘지 않았다.)

그리고 또, 프란치스코 교종이 이 문서 앞부분에서, 미국을 직접 거명하기 직전에, 기후위기는 생명 문제!라고 강조한 점은 흥미롭다. 그는 이렇게 썼다. “이는 전 지구적인 사회 문제이자 인간 생명의 존엄과 긴밀히 연계된 문제다.” 이 매체에서 누군가 전에 “기후 변화는 가장 중요한 생명 문제”라고 주장했는데, 프란치스코 교종이 바로 이 점을 표현하는 것을 보자니 나도 매우 기쁘다.

지난 8월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일어난 산불로 수백 명이 죽었다. (사진 출처 = NCR)
지난 8월 하와이 마우이 섬에서 일어난 산불로 수백 명이 죽었다. (사진 출처 = NCR)

종합하자면, 이번 교종 권고는 ‘찬미받으소서’를 보완하는 중요 문서며, 그 자체로 여러 면에서 예언자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여라’는 그 모든 예언자적, 변증적 방향을 이루고 있음에도, 프란치스코 교종의 교종명을 따온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쓴 글과 그의 생활 모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하느님 피조물의 가정이라는 근본 비전을 온전히 받아 안는 데는 여전히 부족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자신의 교도권 가르침을 짓기 위해 이 중세 성인에게서 영감을 끌어오는 데서 보이듯, 그가 프란치스코 성인과 그리 멀지 않고, 심지어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하던) 피조물 공동체가 지닌 타고난 상호연결과 상호의존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분의 모든 피조물과 하나로 만드셨다. 그럼에도 우리의 기술주의 패러다임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소외될 수 있으며 그러한 패러다임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 전체가 ‘접촉 지대’라는 점을 잊게 함으로써 우리를 기만할 수 있다.” 그리도 뒤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덧붙인다. “인간 생명은 다른 피조물과의 연계를 빼놓으면 그 의미와 존재를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지속불가능하다.”

교종 권고 앞 부분에서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착취, 고삐 매이지 않은 이용과 제한 없는 큰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자연이 그저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우리의 사업 계획을 키워 나가는 ‘배경 장치’일 뿐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는 ‘찬미받으소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자연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한다.‘(139항) 그리하여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바라본다"(220항).

그럼에도, 만약 고삐 매이지 않은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무비판으로 포용된 기술주의 패러다임이 우리 앞에 놓인 긴급한 기후위기의 핵심이라면, 아마도 우리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고, 우리 자신과 여타 피조물을 보는 (성경) 해석학에서 다른 접근법이 필요할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자기는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의 일부이라 인식하며, 그러할 때 비로소 진실로 우리 자신이 피조물이라 인식한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하느님이 창조한 가족의 일부이며, 그저 하느님을 대신하여 고용된 청지기, 정원사, 경작자 등 일꾼에 그치지 않다는 걸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가 이 창조된 세상의 (인류를 제외한) 나머지 피조물에게서 언제나 한 걸음 (또는 더 멀리) 떨어진 존재라고 잘못 생각하는 걸 그만 둘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프란치스코 성인의 흐름 속에서 더 배우고 밝힐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한 지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종의 이번 교종 권고는 신앙을 지닌 이들이 왜 오늘날 해야 할 일들에서 빠져나가면 안 되는지를 강력하게 변증하고 있다. 그가 이 문서의 결론 부근에 가서 말하듯,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고양이 손이라도 있으면 좋은” 일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opinion/ncr-voices/laudate-deum-pope-francis-presents-compelling-climate-crisis-apolo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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