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동애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장)

2007년 7월에 시작하여 현재 930여 일 국회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 중인 김동애(64)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장과 남편 김영곤(62)씨를 만났다. 이들의 투쟁본부는 좁은 텐트 안이다. 그 안에는 노트북은 물론 자잘한 살림살이까지 갖추어져 있다. 집에 들어가 지내는 시간보다 길거리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만큼, 이 텐트가 투쟁본부이며 동시에 살림집인 셈이다. 

▲ 텐트 안에는 썬버너부터 문구류, 침낭 등이 즐비하다. 이들 부부는 아예 텐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강사들의 교원지위 확보를 위해 세상에 호소하고 있다.(사진/한상봉)

격동의 시대, 애틋한 사랑

김동애 씨는 1971년 대학을 마치고, 유학 준비로 중국어를 배우려고 고려대 아시아문제연구소에서 개설한 중국어교실 강좌를 들으러 갔다가 당시 중국어 강좌 한 기수 위였던 김영곤 씨를 만났다. "당시 남편은 비공식 조교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동창이 ‘서로 연애해도 좋겠네.’ 하며 장난스럽게 말하더군요. 그런데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서로 집이 전농동 방향이어서 자연스럽게 강좌 후에 같이 귀가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영곤씨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어요."

1971년 10월 15일 유신정권이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을 내리면서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선포되어 대학에 무장 군인이 진두하게 되었다. 수도경비사령부가 고려대를 진입하여 1.500명을 체포했어요. 고려대 출신인 김영곤씨는 총학생회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들이닥치자 지하 출판부에 숨어 있다가 도망쳤다. 그래서 얼떨결에 김영곤 씨의 은신처를 물색해 주는 심부름꾼 역할을 맡게 된 사람이 김동애 씨다. 이것도 인연이어서 그후론 김동애 씨가 김영곤 씨의 도피생활을 돕는 비밀 연락책이 되었다. 

김영곤 씨는 수배중에 1972년 1월부터 대한광학주식회사를 시작으로 15년간 위장취업자로 공장생활을 했다. 1974년경에는 의자를 만드는 로얄공업에 다녔는데, 10월 유신을 반대한 학생들을 처벌하려는 ‘민우지(民友紙)사건’(김낙중은 주동인물로 지목됨)에 연루되어 5월에 연행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결국 김동애 씨는 유학을 준비하다가 암담한 한국현실을 외면하고 떠날 수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숙명여대 대학원을 다니면서 조교도 하고 야학에도 참여했다. 주변에선 전임강사가 되려면 김영곤 씨와 만나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1975년 초 ‘중국 근대사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하자 바로 2월에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막상 부부가 되자, "둘이 운동하는 것보다 한 사람은 내조하라"는 주변의 충고가 일리 있다 싶어 2년 동안 숙명여대 연구실에 다녔지만, 학교에선 강의를 내주지 않았다. 어느 날 알게 된 사실은,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김동애 씨는 2~3번, 김영곤씨는 5번 북한에 다녀온 빨갱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져있었다. 그래서 연구실을 그만 두고 ‘여성단체협의회’에서 편집일 2년, ‘한국지역사회학교협의회’에서 2년 동안 일했다. 

교정에서 맛본 쓰라린 아픔

▲ 김동애 씨(사진/한상봉)
한편 시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김동애 씨는 1983년 국립대만사범대학으로 유학 가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1986년에 귀국해서 숙명여대 사학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유학할 때 아이들은 친정과 시집에 맡겨놓고,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그때 박사논문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1989년 출국해서 91년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학위를 받았다. 

김동애 씨는 1991년 2학기부터 1999년 2학기까지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뛰었다. 한성대에서는 2학기부터 대우교수로 교육부에 정식교원으로 올리고 강사료는 두 배로 준다고 해서 강의를 맡았는데, 1999년 2학기에는 약속했던 대로 두 배가 아니라 기본 강사료만 지급되었다. "저에게 사전 동의를 받지 않고 대우교수에서 밀어낸 거죠. 그래서 제가 학교측에 한 달 안에 사과하라고 했지요. 학교측에서는 그동안 시혜를 베푼 것이라며 한 달이 다 지나도록 사과 한 마디가 없더라고요."

이 일로 인해 인간적 모멸감을 느껴 이 생활을 계속해야 해야 하는 지 고민하며 김동애 씨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이하 민교협, 1987년 6월 26일 창립)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는데, 민교협은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이하 강사노조, 1990년 4월 28일 창립)에, 강사노조는 민교협에 가보라고 서로가 미루었다. 그래서 혼자서 ‘직위해제 및 감봉무효소송’을 시작했다. 일 년 후에 법원이 소송을 기각하면서 노동부로 가보라고 해서, 노동부에 가니 근로기준법에 의하면 시간강사에게 퇴직금을 지급한 사례가 없다고 했다.

삼섬에서 운영하는 성균관대의 경우, 한 강사가 3년 이상 강의하지 못하도록 해서 2001년 강사노조와 연대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 결성한 강사노조는 이미 무너지고 성균관대 분회와 영남 분회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77년 10월 24일 박정희 정권이 ‘정부안’으로 교육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이는 지식인을 길들이고 저항 지식인을 제도권 밖으로 밀어내고자 시간강사를 대학 교원 범주에서 빼버린 것이다. 아직도 시간강사의 교원의 법적 지위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다. 

일인 시위만이 내가, 우리가 살 길인가? 

이어 김동애 씨는 강사노조와 연대해서 교원지위 회복을 위해 일인 시위를 시작했다. 한성대에서 5개월 동안 천막 농성도 하고 교육과학기술부 앞에서 단식도 했다. 2003년 서울대 백준희 강사가 관악산에서 자살했을 때 시간강사 문제가 사회적 의제도 부상되었고, 정규직 교수도 일인 시위에 참여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도 했다. 2004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비정규직교수 차별을 철회하는 제도개선 권고안을 교과부에 보냈다.

2003년에는 10월 고등법원에서 퇴직금소송에 승소하여 강사료 3배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지불하는 판결이 났다. 그러자 민교협과 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2002년 강사노조가 명칭을 바꿈)은 김동애 씨에게 "2004년 퇴직금도 받았으니까 더 건드리면 강사노조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일인 시위는 그만두라고 했다. 자신들이 대신 싸우겠다고 해서 2년 쉬었다. 근데 그게 화근이었다. 2004년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법안을 발의했는데 2년 동안 법안이 눌러 앉아서 무산되었던 것이다.  그 때에도 계속 투쟁을 했다면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김동애 씨는 후회했다. 

2006년에 기다려도 강사교원지위 회복은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두 단체가 근본적으로 싸울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민교협, 교수노조는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에만 관심이 있고, 시간강사는 4대 보험 적용과 강사료 인상 정도면 충분하다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김동애 씨는 2007년 일 년 동안 국회 앞 농성을 다시 시작했다. 그 당시 김동애 씨는 강사노조에서 ‘한국비정규직교수노동조합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2009년 2월에 노조에서 밀어냈다. 

그래서 2009년 6월 김동애 씨는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를 따로 꾸렸다. 특별한 회칙은 없고, 다만 ‘텐트농성을 교원지위가 확보될 때까지 한다.’는 것만 정해두었다. 투쟁본부에는 현재 참교육학부모, 서울대 대학생사람연대, 한국교수노조 고대분회장, 개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 3월 말에 찍은 사진인데도 국회 앞은 텅 비어 바람이 맵차다.(사진/한상봉)

▲ 김영곤 씨는 아내인 김동애 씨를 대표로 모시고 실무적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사진/한상봉)

자식들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에요

그러나 가족 안에서는 어려움도 많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밖에서 살다시피하니 자녀들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김동애 씨는 이렇게 말한다. “딸과 아들이 사춘기 때에 부모 때문에 상처를 받았어요. 남편이 구속되었을 때 아들이 정신적으로 방황을 많이 했거든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요.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서요.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일인 시위를 했는데 취재기자로 일하는 딸을 그 자리에서 만났어요. ‘엄마, 그만하세요.’라는 말이 가슴에 콱 박히더라고요. 2년 동안 투쟁을 접고 집에서 칩거했는데, 그때 딸이 한 말도 영향을 주었어요."

김동애 씨는 딸이 출산으로 병원에 있을 때 친정어머니의 부재를 겪게 한 것도 마음에 많이 걸렸다. 명절 때도 텐트에서 지내고 있으니까 자취방에서 지내는 아들이 명절에도 집에 못 온다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한번은 세 살배기 손녀가 명절 때 텐트에 와서 "외할머니 집은 어디야?"’하고 물었을 때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 말한다. 그래서 김동애 씨는 "자식들과 화해하고, 서로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하는데 아직은 그런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어요. 조만간 그런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어요."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소화 데레사, "국회에서 촛불평화미사 할 수 있음 좋겠어요"

그뿐 만이 아니다. 본인들도 비바람 땡볕을 견디며 오랫동안 텐트에서 지내면서 몸도 마음도 많이 상했다. "몸속에 종양이 있는데, 암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있는 것이 아닌 가라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해요. 투쟁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졌어요. 종종 깜깜한 밤길을 걸을 때 혹시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러나 신앙이 그를 지켜주었음을 감사하고 있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번역서를 냈는데, 그때 내 마음대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이 투쟁은 하느님께서 저에게 허락하신 십자가라고 여겨 소명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현재 김동애 씨는 인천교구 OO성당에 교적을 두고 있다. 세례명은 소화 데레사. 평일 새벽 미사에 참례할 때가 많은 데 미사 중에 위로를 받고 마음이 많이 충전된다고 한다. 그동안 열심히 참여했던 용산 촛불평화미사도 많은 힘이 되었다. "국회 앞에도 매주 촛불평화미사가 왔으면 좋겠어요. 국회는 국민들과 국회의원들이 마주치는 자리예요. 이곳에서 그 주에 토픽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표를 의식하는 국회의원들이 안 올 수 없지요. 그래서 여기서 외쳐야 한다고 봐요."

▲ 2008년 서울 정동 품사랑갤러리에서 열린 촛불평화미사에 참석한 김동애 씨(사진/한상봉)

김동애 씨와 김영곤 씨는 투쟁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녹록하지 않은 국회 앞 텐트를 계속 지키려고 다짐한다. "처음에는 천막을 쳤는데 천막은 주거지로 여겨 경찰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어요. 텐트는 주택이 아니어서 철거하지 못해요. 텐트가 자리 잡고 있는 땅은 국민은행 소유여서 사유지에는 경찰 마음대로 철거를 못하기도 하고요. 한동안 국민은행에서 텐트를 걷어내겠다고 위협해서, 제가 강사노조 노조원들에게 말해서 국민은행에 있는 돈을 다 인출하라고 할 것이라고 맞섰지요. 최근에는 ‘텐트가 있는 자리에 꼭 공사를 해야겠다.’며 주말을 노리고 있어요. 주말에는 집에 가서 씻기도 하고 텐트에서 있는 동안 먹을 밑반찬도 만들었는데... 이제는 주말에도 집에 갈 수가 없어요."

나중에 당진에서 농사 짓고 살고 싶어

김동애 씨는 강사교원지위 회복되면 남편 고향인 충남 당진군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나마 죄를 짓고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농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초빙교수로 고려대학교 조치원캠퍼스에서 ‘노동의 역사, 노동의 미래’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김영곤씨는 "대학교육 문제는 우리나라 가정의 제1순위 관심사이지요. 그런데 입시 때까지만 열성이고 그 후에는 무관심해요. 교원 범주에서 제외된 시간강사들의 교원지위 회복은 단지 강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생들의 학습권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요, 대학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도록 일방적인 주입식이 아니라 창의적 토론식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동애 씨는 남편 김영곤 씨와 부부가 같이 하는 운동이라 더 좋다고 말한다. "같이 있어서 참 좋아요. 젊었을 때는 영곤 씨가 노동운동하느라 숨어 지낸 적이 많아서 함께 한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가끔 투쟁에 접근하는 관점이 달라서 싸울 때도 있어요. 저는 ‘상식선에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 투쟁을 ‘대학강사 처우, 당사자 운동’에 집중하는 반면, 남편은 전문적인 노동운동가 출신이어서 그런지 ‘대학생들의 학습권’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지요. ‘학생들이 어쩌다가 바보가 되었는지’ 안타까워하면서 ‘사회변화’에 중심을 두고 있지요. 투쟁을 이끌어가려면 역할 분담을 해야 해서 갈등상황을 오래 끌고 갈 수 없지요. 그래서 화해해요. 저녁때는 커피도 타주면서 나름 잘 지내고 있어요."

결혼 때, 일생을 동지로 살아가겠다고 맹서한 두 사람은 적지 않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노상에서 숙식하며 투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명나는 대학사회를 위해 두 손을 맞잡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향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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