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태풍으로 잠깐 누그러들었던 폭염이 막바지 기세를 내뿜는다.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나면 폭염은 서서히 물러서겠지만, 원고 압박은 더위 핑계 따위를 양해하지 않는다. 1년 중 이맘때 잠깐 눈 딱 감자면서 천장에 달린 에어컨을 켠다. 전기요금이 걱정되는 건 아니다. 탄소 배출 줄이자는 글을 써야 하기에 망설일 따름이다.

여름이 전 같지 않으니 에어컨 타령에 공감하는 이가 거의 없다. 부자만 설치하는 걸로 알았던 에어컨은 혼수품 반열에 오르더니 이제 목록에서 제외될 것 같다. 최근 분양하는 아파트마다 천장 여기저기에 당연히 붙어 있지 않은가. 하긴 은퇴한 시간강사의 집에도 있으니, 더워서 마감을 지키지 못했다는 핑계는 이해될 리 없다. 이럴 때 태양광 전기로 에어컨을 켜면 마음이 다소 편할까? 뭐 그렇지도 않다. 에어컨을 제조 판매하면서 배출하는 탄소도 만만치 않다. 최근 세간에 논란이 된 상온 초전도체가 널리 보급되면 달라지려나?

초전도? 전기가 전선을 흐를 때 저항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인가? 온도를 매우 낮추면 저항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학생 때 들은 듯한데, 일상에서 저항이 생기지 않게 하는 물질을 우리나라가 개발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관련 주식이 오른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그런 과학 관련 뉴스는 논문을 뒷받침해야 신빙성이 큰데, 의도된 풍문이었는지 논란이 거셌고 그때마다 주가가 요동쳤다고 한다. 상온 초전도체는 구리, 납, 인, 산소의 화합물인 ‘LK-99’라는데, 일상에 스며든다면 기후와 에너지 문제는 사라질까? 그리 기대하는 소리가 크다.

“꿈 깨라!”는 과학자의 주장이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최근호에 실렸다고 우리 생명윤리학자가 알렸다. 지극히 허술한 토대 위에 놓인 먼 미래의 가정이라면서, 그 물질이 경제적으로 실생활에 적용되면 에너지 효율을 조금 높일 정도라고 글쓴이는 진단했다. 노벨상 수상은 타 놓은 거라는 식의 애국적 상상은 과도한 김칫국이라는 해석일 텐데, “쉬운 답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집단적 욕망과 희망적 사고”가 빚은 열광이라고 명성 높은 과학잡지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요즘 가전제품의 효율은 예전보다 크게 개선되었다. 같은 가전제품을 더 작은 전력으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전기요금이 줄었을까? 효율이 개선되자 우리는 냉장고와 에어컨의 용량을 키웠다. 한 대에서 만족하지 않자 소비전력이 늘어났다. 전기요금은 물론 줄지 않았고 기후와 에너지 문제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른바 ‘제번스 역설’이다.

증기기관으로 효율이 향상돼 석탄 소비가 줄어들 거로 믿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수요 증가로 석탄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을 지적한 1865년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의 역설은 상온 초전도체가 실용화되더라도 예외일 수 없다. 기후위기 대안이 될 리 만무하다. 엔진 효율이 높아지면서 주행거리가 길어졌을 뿐 아니라 승용차가 커지고 편의 장치가 요란해졌다. 상온 초전도체가 자동차 산업에 반영돼 단가가 낮아져도 소용없을 것이다. 개인 드론 승용차들로 하늘이 어지러워지는 세상을 연상하지 않을까?

석유는 머지않아 고갈을 드러낼 텐데, 석탄이 대안으로 유효할 리 없다. 석탄을 석유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에너지 낭비는 걷잡을 수 없다. 식물로 추출하는 바이오디젤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바이오디젤을 위해 곡물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소비하는 화석연료를 고려해야 한다. 크고 작은 사고의 위험성은 둘째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방사성 폐기물을 처리할 방법이 없는 핵발전과 더불어 핵융합 역시 기대할 수 없다. 거대한 시설을 세우는 과정, 그리고 가동, 수리, 폐기하는 데 허비되는 에너지가 막대하다.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실격이지만, 제번스 역설을 생각해 보라. 실용화 이후가 더 걱정이다.

에너지 보전의 법칙을 고려하면 기술로 기후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구상은 대체로 부질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석탄화력발전소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를 모아 처리하겠다는 ‘탄소 포집’은 온갖 가정이 만족해야 실용화를 기대할 수 있지만, 그 가정은 무모하다. 포집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도 무시할 수 없는데, 기껏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어디에 어떻게 안전하게 영구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액화천연가스에서 수소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기술은 기후변화 시대에 대안이 되기 어렵다.

크릴. 크릴과 고래가 오랜 세월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탄소 포집을 해왔는데, 과식과 포만으로 토실토실한 인간은 크릴과 고래를 잡는 데 혈안이다. (사진 출처 = flickr.com)
크릴. 크릴과 고래가 오랜 세월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탄소 포집을 해왔는데, 과식과 포만으로 토실토실한 인간은 크릴과 고래를 잡는 데 혈안이다. (사진 출처 = flickr.com)

8월 11일은 ‘세계 크릴의 날’이다. 남극으로 모여드는 거대한 고래는 크릴을 먹으며 살아간다. 거대한 고래 사체는 보기 어렵다. 막대한 이산화탄소를 몸에 담고 심해로 빠져들어가기 때문이라는데, 고래가 자연스럽게 포집하는 탄소는 기후위기를 크게 완화한다고 과학자는 분석한다. 남극 해역에 막대하게 분포하는 크릴도 비슷하다. 식물성플랑크톤을 먹은 뒤의 배설물은 심해에 가라앉아 탄소를 잡아준다는 게 아닌가. 크릴과 고래가 오랜 세월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탄소 포집을 해왔는데, 과식과 포만으로 토실토실한 인간은 크릴과 고래를 잡는 데 혈안이다. 생태계 조화가 무너질 지경이다.

기상이변이 다가오면서 언론은 기후위기를 경고하는 방송을 편성하며 전문가 의견을 덧붙인다. 눈앞으로 다가온 위기를 상기하는 데 시간을 쏟은 전문가는 대안으로 생활 습관의 획기적 전환을 주문했다. 하지만 정작 어떻게 전환해야 하는지 언급하지 않아 아쉬웠다. 무엇일까? 상온 초전도체는 아니다. 핵발전도 핵융합도 아니다. 차라리 크릴새우를 먹지 말자. 이미 충분히 건강하게 오래 사는 인류는 생태계의 보전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생태계는 가장 저변의 플랑크톤과 가장 상위의 깃대종이 안전성을 보장한다. 크릴과 고래가 그렇다. 크릴과 고래가 건강할 때 인류는 생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조금만 더 참으면 모기의 입이 삐뚤어진다. 처서가 지나 모기가 물어도 크게 가렵지 않다. 기후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일상은 자본이 개발한 거대한 기술이 안내하지 않는다. 조상이 건강하게 살던 시절, 그리 멀지 않던 과거, 생태계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자연스러운 삶에 있다. 부질없는 상온 초전도체 논란에서 새삼 20여 년 전 황우석 사태가 연상된다.
 

박병상
60플러스 기후행동,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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