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 지음 / 돌베개, 2004

선택은 필연적으로 배제를 전제로 한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를 잃는 것이다. 선택한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월등히 가치가 있을 때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거냐 저거냐 하는 갈림길에서 선뜻 하나를 고르기가 쉽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더구나 한 사람의 식견이란 날고 뛰어봐야 거기서 거기다.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게 제일 좋다, 해봐야 결국 장님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이다.

스스로 '마구잡이 독서가'라고 칭해보지만 수많은 간행물들을 모두 섭렵했을 리 만무하고, 개인적 성향이나 이데올로기를 훌쩍 뛰어넘어 공평무사한 입장에서 '나는 이 책이 제일이오'라고 말할 처지도 못됨을 우선 고백해야겠다. 나는 나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편견의 한 가운데서 나를 스쳐간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을 하나 고른다.

승효상의 <건축, 사유의 기호>는 저자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책이었다. 나의 편견은 승효상의 편견과 의기투합한다.

내가 사는 마포의 스카이라인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간다. 30층이 훌쩍 넘는 엄청난 고층빌딩이 몇 년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한강을 둘러싸고 있는 아파트들은 도심으로 불어가는 강바람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작년만 해도 주방의 작은 창으로 손바닥만큼 보이던 한강의 모습도 새로 짓는 아파트로 차단된 지 오래다. 럭셔리함을 강조하는 본때없는 건물들이 부의 위용을 과시할 뿐이다. 비움의 미학, 절제의 미학, 느림의 미학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한 치의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해보겠다는 생산과 효율의 논리다.

이런 논리 앞에서 침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존재를 도드라지게 알리기 위해서 간판의 불빛은 요란해지고, 스트레스를 걷어버리겠다는 의지로 악을 써대는 노래방의 소음은 귀를 괴롭힌다.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짚어보기도 어렵다. 곤혹스럽다. 바로 이 곤혹스러움이 승효상이 가슴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승효상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비움'이다. 꼭꼭 채우지만 말고 이제는 좀 비우자는 말이다. 건축주들은 내 것 내가 알아서 하는 데 참견 마시오,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래선 안 된다는 얘기다. 한 인터뷰에서 승효상은 말한다. "우리의 도시환경은 꽉꽉 채우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비워두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 대가로 우리 삶은 많이 망가져 있지요. 비움의 대표적인 예가 '마당'인데요, 옛 선조들은 양반이나 평민이나 한 마당을 다용도로 함께 썼어요. 공동체 공간이었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마당이 있습니까? '길'도 그래요. 예전에 '길'은 어린이들의 놀이터이자 마을사람들의 토론장이고 아낙네들의 빨래터였는데, 요즘 '길'은 그냥 통행기능만 하잖아요. '공동체 공간'을 잃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극도로 이기주의에 빠지고 서로 마음을 닫고 살지요." 건축이 개인의 사유물이라는 생각, 건축물이 치부의 수단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건축이 우리의 삶을 담는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건축의 비전을 찾자는 이야기다. 버릴 게 없는 말씀이다.


인터뷰는 이어진다. "천민 자본주의가 문제입니다. 오래된 집을 자꾸 허물고 그 자리에 더 비싼 집을 짓는 것은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에 대한 기억을 허무는 거예요. 도대체 사람들이 집에 대한 귀소본능을 못 느끼게 돼요. 이러다간 전국이 다 똑같은 모양의 신도시처럼 될까봐 걱정입니다." 왜 아니겠는가. 기억은 공간에 거주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건물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인간의 기억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자본가들은 망각한다. 바로 그 공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이 한 인간의 존재의 뿌리라는 사실도 그들은 망각한다. 오직 채움의 욕망만이 그들을 추동한다.

그는 늘 비움과 절제를 역설한다. 모두 17개 건축물을 논의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건축, 사유의 기호>의 텍스트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비움과 절제'를 말한다. 화려한 외관과 장식을 배제하고 공간을 틔워 인간을 연결하는 건축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승효상은 고백하고 있다. 승효상이 그런 고백을 할 때 그 글을 읽는 나도 조금은 헐렁하게 호흡할 수 있다.

책은 무미건조한 건물들만 잔뜩 모아 놓았다. 대단한 건축물을 기대했던 이들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채근담에서 홍자성은 ""농비신감 비진미(膿肥辛甘 非眞味), 진미 지시담(眞味 只是淡). - 진한 술, 기름진 고기 맵고 단 것은 참맛이 아니요, 참맛은 오직 담백하다."" 이라 했다. 건빵도 오래 씹으면 감칠맛이 나는 법이다. 자극적인 맛은 오래 가지 못한다. 승효상의 건축 미학, 빈자의 미학도 홍자성의 말하는 '담백의 미학'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책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의 미하엘 광장에 자리잡고 있는 로스하우스를 소개한다. 왕궁과 마주 서 있는 이 건물은 일체의 장식 없이 기능적 요소로만 구성된 이 6층짜리 집이다. 1911년 완공 당시 화려하기 그지없는 왕궁에 대한 모독이란 비난까지 받았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시민계급이 신분적 열등감을 덮기 위해 과시적으로 화려한 장식으로 일삼던 문화적 퇴행을 잘라내고 모더니즘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든 혁명적인 건축물로 평가된다. 승효상은 로스하우스를 말하고 있지만 실은 절제와 여유와 침묵을 잃어버린 우리네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둘러보시라. 대체 부석사 무량수전과 개심사를 건축한 민족, 시가(詩歌)마다 안분지족(安分知足)과 한중진미(閑中珍味)를 노래하던 저 여유의 미학은 어디에 있는가.

읽히는 데서 끝나는 것이 책의 운명은 아니다. 한 사람의 사유에서 비롯된 책이 다른 이에게 건네져 사유는 더 농밀해지고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밝은 전망을 갖는다. 승효상의 <건축, 사유의 기호>는 그렇게 읽힐 책이다. 사족이지만 이 책은 무욕을 말하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욕망을 부추기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에 있다는 르 토로네 수도원에 가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한동안 시달리고 있다. 침묵의 세례를 받고싶다는 욕망!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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