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성주간에 내 맘에 울린 시 구절은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타의 시 '두 번은 없다' 중,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였다. 

늘 있어 왔던 학교 성당에서 열리는 성삼일 전례, 어떨 때는 부담스러웠고, 어떨 때는 너무 당연히 내게 주어졌던 구원의 드라마, 그 속으로 주저하며, 걸어가면 되었던 이 전례가 이제 정말 다시는 없을 마지막 전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이어서 그렇게 아름다운 건가. 성목요일, 수업을 줌으로 마치고, 학교에 가려고 운전을 하면서 차창 문을 열었는데, 바람에 날려 떨어지던 하얀 꽃잎 하나가 내 어깨로 떨어진다.

성당은 예수님이 하셨던 만찬을 재현하기 위해, 아주 친밀한 저녁상으로 꾸며졌다. 나는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에 앉은 세실이 부활 전례에 입을 드레스를 주문했는데, 받아 보니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주문했다고 이야기했고, 유딧은 할머니가 아프셔서 걱정이라고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들의 어깨를 토닥이다가, 예수님의 마음도 이러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하는 저녁이란, 그분에게 도대체 어떤 맘이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미사 하는 동안, 신부님의 얼굴을 보니, 울컥울컥하신다. 새로 가실 거처를 정하시고 한숨은 돌렸지만, 당신이 돌보던 이 대학 교회 공동체를 정리하는 마음은 또 어떠할까. 전례 중 우리는 서로서로의 손을 닦아 주었다. 아이들은 어색한지 키득키득 웃다가, 또 정색하며 따스하게 서로를 닦아 준다. 종을 열심히 흔들다가 종이 저만치 날아가자 주체를 못한 채 서로 웃다가, 눈물이 흐르는 걸 참지 못했다. 내가 눈물을 보이자, 학생들이 나를 꼭 안아 주는데, 그동안 전례를 같이 하던 많은 젊은이들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수업에서는 말하지 않던, 마음속의 깊은 이야기들을 내게 들려주던 그 젊은이들은 이제 어디에선가 자기들의 삶을 꾸려 가고 있으리라. 그래서 그들의 멋진 삶을 위해 기도 드렸다.

그리고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절을 하다가, 젊은이들이 십자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친구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행렬 뒤에, 이제는 은퇴한 늙은 내 교수들의 구부정한 어깨와 깊게 패인 주름, 그리고 천천한 걸음에서 오래된 사랑을 보고 자꾸만 훌훌 떨어지던 꽃잎이 생각났다. 사라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성 토요일: 텅 빈 고요의 시간이 주는 은총이 온 우주를 채우는 날.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음을 배우는 날. 생명의 빛이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날. ©박정은

그리고 성 토요일. 아무것도 없는 시간. 내가 성삼일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우리 동네 성당에 들러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무에서 충만으로 가는 길 같은 시간, 그래서 내 속의 모든 것을 비워 내야 하는 시간. 새 생명이 담기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래서 나는 성 토요일의 빈 시간을 가장 길게 지낼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학교 미사는 오후 다섯 시. 그 장엄한 마지막을 위해, 나는 그저 산책을 하고, 계절을 만나고, 그리고 예수님의 불꽃 같은 삶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성 토요일은 한 학생의 문자로 일찍 마감되었다. 할머니가 자신의 견진 대모를 서 주기로 하셨는데, 병원에서 퇴원이 안 된다는, 그래서 내가 대타(the proxy)를 서 줄 수 있냐는 거였다. 여기서 대타는 내가 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견진식 중, 공식적으로 그 학생의 할머니를 대신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나는 동의했고, 덕분에 일찍 학교에 가야 했으며, 부활 성야 미사에 견진 성사를 받는 예쁘고 멋지게 차려 입은 학생 열 명과 전례 연습을 했다. 성 토요일의 의미를 만들 수 없고, 만들 필요도 없는 텅 빈 충만의 시간은 아쉬웠지만, 절대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부활 전례는 우리가 만드는 전례라서 좀 틀려도 괜찮았으며, 실수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괜찮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내게 이 미사는 마치 세상의 마지막 날에 드리는 미사 같았는데, 다시는 없을 홀리네임즈 대학의 부활 미사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맞이하는 모든 부활 미사는 마지막 부활 미사이기 때문이다. 어떤 미사도, 어떤 일상도, 같은 것은 없다. 되풀이되는 것은 없다. 그저 우리의 삶은 흐르고 있고, 그곳에 성령께서 함께 흐르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서로를 돌보고 아끼는 일이겠지. 이 정도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부활 미사를 참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서 눈물과 함께 불쑥 올라왔다.

그리고 부활절 아침. 환하게 밝아 온 아침 햇살을 만나며, 내게 밝아 올 부활의 날들을 아직은 어정쩡하게 기다리고 있다. 부활을 산다는 건 도대체 무얼까? 오늘 성서 말씀을 읽으며 나는 새로운 누룩을 생각한다. 부활의 일상이란 오래된 누룩으로 그저 익숙하게 빵을 부풀리고, 그저 익숙한 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누룩으로 새로운 빵을 만드는 거라고. 만일 날마다, 내가 새로운 누룩이 된다면, 새롭고 설레는 변화가 생길 것이다. 오늘, 내 안의 새로운 누룩은, 내가 모를 향취와 결을 가진 알지 못할 빵이 될 것이다. 오늘은 내 영혼이 부풀어 올라 크루아상이 되고, 내일은 내 영혼이 부풀어 올라 단팥빵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내 빈약한 상상력에 실망을 하게 된다. 겨우 새로운 빵이 크루아상이나 단팥빵이라니? 이 빵을 먹으면 웃음이 절로 나오게 된다든지, 내 안의 새로운 누룩으로 만들어진 빵을 먹으면 행복해진다든지 뭐 그런 빵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나는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이다.” 부활의 빛 속으로 새롭게 또 걸어가다 보면, 내 안의 새로운 누룩도 이런저런 모양을 거쳐, 생명을 담은, 예수님을 닮은 그런 빵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기로 한다. 낙화를 슬퍼하던 나무는 벌써 옹글게 조그만 잎을 피우고 있다. 짙은 여름을 아직 상상하지 못하는 나무는 그저 잎을 피워 내는 거다. 그래서 세상은 신록이다.

꽃잎이 바람에 다 떨구고 새로운 잎을 틔우는 나무처럼, 부활의 생명은 그렇게 푸르게 우리를 크게 하리라. 그리스도를 따르던 첫 마음은 연초록 잎이 되어, 언젠가 누구에겐가 그늘이 되겠지. ©박정은
꽃잎을 바람에 다 떨구고 새로운 잎을 틔우는 나무처럼, 부활의 생명은 그렇게 푸르게 우리를 크게 하리라. 그리스도를 따르던 첫 마음은 연초록 잎이 되어, 언젠가 누구에겐가 그늘이 되겠지.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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