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우리 집 닭장에 사는 최고령 청계 할머니(7-8년째 동거 중)가 일을 냈다. 할머니는 주로 닭장 내 2층 공간(경로당)에서 생활하는데, 닭장에 들어간 다울 아빠가 우연히 거길 살피다가 할머니가 고이 숨겨 둔 달걀 네 알을 발견해낸 것이다.

“검은 닭이 아.직.도. 알을 낳나 보네.”

“검은 닭이 알을 낳는다고요? 에이, 설마.”

믿기 어려웠지만 정말 내 앞에는 달걀 네 알이 있었다. 도대체 언제 낳아 얼마만큼 오래 숨겨져 있었는지 모를 알들이었다. 혹시나 하고 깨뜨려 보았더니 노른자 모양이 조금 이상하고 흰자 점성도 묽어진 상태라 먹지는 못했지만 늙은 닭이 알을 낳았다니 그것만으로도 신기한 노릇이었다.

대체 닭은 언제까지 알을 낳는 걸까?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했다. 다만 통상적으로 생후 60주 정도만 지나면 완전히 노계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산란 능력이 확연히 줄어드니 노계로 분리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생후 2년도 되기 전에 산란 능력을 상실하고 폐처분(?) 명단에 올려진다는 말씀?

그동안 닭과 함께 살았던 내 미천한 경험으로 볼 때 2-3년간은 알을 제법 낳는다. 다만 기계처럼 날마다 알을 뽑아내지는 못하니 생산성이 떨어진다 생각하는 것일 수 있겠다. 게다가 뜸하게 낳는 알 몇 개를 바라고 닭을 내버려 두게 되면 닭의 개월 수만큼 (먹는 인간 입장에서) 고기 품질도 떨어지기 때문에 ‘땡처리 품목’ 대하듯이 처리하게 되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고기나 달걀을 팔지 않고 집에서 먹는 정도로 닭을 키우는 시골 농가라 할지라도 봄에 병아리를 사다가 겨울 전에 다 잡아먹는 게 일반적이다. 대부분의 닭은 1년짜리 시한부 목숨을 선고받고 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닭의 평균 수명이 보통은 7-13년, 많이 살면 20년 이상이라던데, 온 생을 다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닭들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또한 호시탐탐 청계 할머니를 닭장에서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알을 안 낳는 늙은 암탉이라니, 경제 가치로 보면 마이너스 아닌가. 눈칫밥을 안 주려야 안 줄 수가 없어서 누가 데려간다고 할 리야 없겠지만 있다면 당장 떠넘기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우리 집에 오셨던 친정 엄마가 푹 고아서 닭죽이나 끓일까 하시기에 얼른 그러라고 했는데 다울이가 안 된다고 성화였다.(그게 벌써 1년 전 일이다.)

“검은 닭이 나랑 얼마나 친한 사이인 줄 알아?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 제발!!!”

그렇게 해서 결국은 살아남게 된 청계 할머니, 오늘까지도 닭 집사인 다울이와 다랑이의 특별 대우를 받으며 팔팔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특별 대우냐고? 다울이와 다랑이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닭 모이 주는 일을 맡고 있는데(다울이가 기숙학교에 가게 되어 요즘은 평일은 다랑이가, 주말은 다울이가 준다), 모이를 줄 때 모이를 한번에 땅바닥에 쏟아 붓지 않고 따로 남겼다가 2층 경로당 청계 할머니 발치에 부어 준다. 할머니가 젊은 것들 기세에 치여서 모이를 먹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따로 한 상 차려드리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청계 할머니의 태도다. 문 옆 높은 자리에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이가 닭장에 들어가면 ‘여왕 폐하 납신다’ 소리가 나올 기세로 푸드득 날아서 자기 자리로 가서 기다린다. 그러다가 아이가 모이를 쏟아 주면 ‘오냐, 수고했다’ 하는 자세로 고개를 까딱까딱 인사를 보낸다. 그러고는 다른 닭들과의 경쟁 없이 여유롭고 당당하게 혼자만의 만찬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나 같으면, 내가 청계 할머니라면’ 하고 생각해 본다. 늙은 몸은 생산 가치가 없으므로 존재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사회적 시선 앞에서 나도 저렇게 위풍당당할 수 있을까? 나라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신세를 한탄하며 스스로를 더욱 쪼그라들게 하지는 않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늙은 나를 따로 챙겨 줘서 고맙고 미안하다, 알도 잘 못 낳는데 이런 나도 먹을 자격이 있나’ 따위 자의식에 시달릴 게 분명하다. 청계 할머니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에는 이미 그러한 사회적 시선이 내면화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청계 할머니의 여유로운 모습과 위풍당당한 태도 앞에서 나도 결국 내 뒤틀린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늙음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는 수많은 닭들의 운명 앞에서 그녀가 누리는 하루하루는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알을 낳건 안 낳건 그녀의 삶은 이미 혁명이다. 늙어 가는 나날 또한 생의 온전함을 이루는 한 부분임을 몸소 증명해 내는 혁명 말이다. 그러니 할머니 삶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그날에 이르기까지 오늘처럼 위풍당당하게 사시기를 바란다. 오래오래!

김환영 작가의 "따뜻해" 그림책 속 한 장면. 전시회 갔다가 얻어 온 엽서에 다나가 색칠했다. (사진 출처 = 정청라)
김환영 작가의 "따뜻해" 그림책 속 한 장면. 전시회 갔다가 얻어 온 엽서에 다나가 색칠했다. (사진 출처 = 정청라)

정청라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무관심, 무 호기심의 삭막한 땅을 
관심과 호기심의 정원으로 바꿔 보려 합니다.
아이들과 동물들의 은덕에 기대어서 말이죠.
무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명랑한 어른으로 자라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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