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 11월. 더 이상 감출 것도 없고, 그저 환한 햇살 아래 핵심만을 내놓고 허허롭게 웃는 나무를 바라보는 달. 뚝뚝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면서, 인생이 순례임을 생각하는 달. 그리고 죽음과 그 속에서 희망을 보는 달. 그래서 내면의 집을 서둘러 지어야 하는 달이다. 이 아름다운 한 달을, 그냥 11월이라고 부르는 게 불만이었는데, 순 우리말로 미틈달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틈달, 겨울로, 그 내면의 집으로 서둘러 들어가는 달이라는 뜻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미틈달을 맞이하고자, 시월의 마지막 주말에 학생들과 피정을 하고 있었다. 핼러윈 파티를 포기하고 여기 온 아이들의 들썩거리는 엉덩이와, 하나도 마침 없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픈, 이젠 구식이 되어버린 저 노년의 마음과의 간극 때문에 안쓰러웠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그날 밤 나는 아이들의 손금을 읽어 주고 있었다. 학생들은 눈을 빛내며, 자기 지금 사귀는 친구와 끝까지 갈 수 있는 지, 혹시 결혼은 언제쯤 하게 될지, 파트너들은 잘생겼는지 등을 물었다. 나의 대답은 거의, “너 이 사람하고 결혼하려면, 정말 노력해야 한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만일 안 그러면, 여기 이 손금 부분 연결 잘 된 거 보이지? 네가 잘 못하면, 그 사람 떠날 수 있어”와 같은 톤으로 결국 공부하라거나, 너무 연애에 빠지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며, 특히 너희들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 놈들과는 절대 사귀지 말자는 이야기를 강조했다. 이번에는 특히 동성애 학생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내가 그 아이들의 성 정체성을 몰라서 너의 그녀 혹은 그라고 하면, 그 아이들은 수줍게 웃으며, “아니, 아니, 그요(He).” 아니면, “수녀님, 나한테는 그녀요(she)” 했다. 나는 그게 너무 행복했다. 그것이 동성이 되었든 이성이 되었든, 사랑을 기다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그들을 보는 게 너무 행복했다. 그래, 그런데 스무 살이니까.

아이들과 우리 비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 힘들어도 기죽지 말자고, 서로 꿈을 포기하지 말자고, 이야기하고 방에 들어왔는데, 함께 간 수녀님이 문을 두드리면서, 너 괜챦냐고 물으셨다.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이태원을 이야기하셨다. 이태원? 핼러윈 파티? 아니 그게 무슨 핼러윈 파티 같은 이야기냐고 어리둥절하는데, 수녀님이 뉴스를 보여 주셨다. 할 말이 없었다.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우리 나라에서 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현기증이 났다. 나는 그저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 아직은 괜찮다고 했다. 나는 안다. 이 아픔과 절망, 그리고 슬픔은 서서히 나를 분노 속으로 몰고 갈 것이고, 사회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나의 가톨릭 자아가 나에게 너는 지금 무얼하고 있냐고 서늘하게 물을 것이라는 것을.

핼러윈은 삶과 죽음의 세계, 그 간극이 없어지는 날이다. 어쩌면 미틈달 자체가 그런 달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순례하는 교회는, 영원한 실존적 나그네인 우리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그걸 우리는 종말적인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솔직히, 이 미틈달에 우리가 겪는 상처를 대면할 만한 내면의 집을 제대로 짓지 않았다. 십 수년을 알아 왔던, 제프 신부가 암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저 내 죽음도 저렇게 순하고, 잘 받아 안을 수 그런 것이 되도록, 나 나름 이 계절을 잘 보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성서가 말하는 종말의 날처럼, 그렇게 도둑처럼, 우리는 또 많은 젊은 생명을 잃었다. 아직 세월호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제 또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야 한다니. 게다가 또다시 세월호 세대의 아이들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니 할 말을 잃는다. 

인간의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십대에 맞은 종말들, 그리고 그 종말을 목도하는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의 정의를 갈망할 수밖에 없다. 너무 힘들어서 말도 하기 싫은 이때, 신앙인으로 내가 할 일은 무엇보다, 이 젊은이들에게 “내 책임이야. 미안해”라고 말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인이 해야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어느 특정인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미안합니다. 당신보다 오래 산 나의 불찰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실망과 분노로 갈라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누구나 흠집이 있어. 그래도 울릴 수 있는 마음의 종을 울려야 해. 완전한 봉헌을 잊어 버리고, 누구나 평화와 정의에 대한 설교를 나즈막한 목소리로 하는 거야. ©박정은
누구나 흠집이 있어. 그래도 울릴 수 있는 마음의 종을 울려야 해. 완전한 봉헌을 잊어 버리고, 누구나 평화와 정의에 대한 설교를 나즈막한 목소리로 하는 거야. ©박정은

레오나트 코헨은 그의 송가(Anthem)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직 소리를 낼 수 있는  종들을 울려.

그대의 완벽한 봉헌은 잊어버려.

갈라진 틈이 있어,

모든 것에는

틈이 있어.

그렇게 빛은 들어 오는 거야.

하느님나라는 멀고, 아직 어둡기만 이 시기에, 완전한 봉헌 따윈 잊어버려야 한다. 깨어진 틈이 없는 멋진 종이라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나의 부족을 받아 삼키면서, 그렇게 종을 울려야 한다. 그 틈새를 통해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게 깨어진 종들이나마, 그래도 그 종들을 울리면서,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새로운 나라를 기다려야 한다.

겨울 속 혼돈과 추위 속에서도 빛으로 동터 오는 하늘나라의 정의를 맞으러 가자. ©박정은
겨울 속 혼돈과 추위 속에서도 빛으로 동터 오는 하늘나라의 정의를 맞으러 가자. ©박정은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전쟁의 소식, 그리고 가난의 이야기가 여전히 세상을 메우고 있다. 내가 사는 이곳 오크랜드에는 사람들이 길가에 주차를 꺼려한다. 사람들이 차의 부속들을 빼내어 가는 사고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시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래서 불안증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그리고 점점 많아지는 총기 사건들 앞에,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력하게 느껴진다. 토머스 머튼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진정한 노력의 시작은 상대방을 진지하게 듣는 일이라고 했다. 오늘의 부서진 사회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서로 완전하지 않지만, 서로 마음속에 울리는 종소리를 간곡한 맘으로 들을 일이다. 그러니 함께 열심히 계속 그렇게 서로 마음을 합하여 종을 쳐야 한다. 정의의 그 나라가 올 때까지, 쉬지 말고, 항구하게. 그러니, 이제 우리는 슬픔의 노래를 외쳐야 한다. 침묵의 애도 말고.

미틈 달, 텅 빈 내 맘속 둥지에, 정의와 평화의 알을 품었지. 어느 봄날, 우리는 정의의 새가 높이 나는 것을 볼거야.&nbsp;©박정은<br>
미틈 달, 텅 빈 내 맘속 둥지에, 정의와 평화의 알을 품었지. 어느 봄날, 우리는 정의의 새가 높이 나는 것을 볼거야.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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