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로 대주교 30주기에 붙이는 글

여러분이 교회

3월 24일, 오늘은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서거 30주기다. 로메로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1967년에 발표된 바오로 6세 교황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 힘입어 열린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데인 중남미주교회의와 1979년에 열린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 선포한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해 투신했던 엘살바도르의 순교자다. 

로메로(Romero, Oscar Arnulfo, 1917~1980)는 “폭력이 호흡처럼 퍼져있는 나라” 불의에 대항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 대가로 로메로는 군사정권의 사주를 받은 무장 괴한에 의한 암살당했다. 그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였으며,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예언했다.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다시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서 솟아오를 것이다."

로메로 대주교는 죽고 없지만, 그가 마지막 남긴 "여러분이 교회"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말한다.

"역사에서 비롯된 죄악을 뿌리뽑는 일, 정치 질서에서 비롯된 죄악을 뿌리뽑는 일, 경제에서 비롯된 죄악을 뿌리뽑는 일, 어디에 존재하든간에 죄악이면 모두 뿌리뽑는 일, 바로 이것이 교회에 위임된 사명, 하나의 고달픈 사명입니다. 이는 실로 힘겨운 사명입니다. 이토록 이기심이 만연되고, 이토록 오만이 팽배하고, 이토록 허영이 난무하고, 이토록 죄악의 권세를 거머쥔 자들이 우리 가운데서 판을 치는 이 마당에, 교회가 어찌 고달픔을 겪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죄악을 뿌리뽑기 위해서, 교회는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만일 로메로 대주교가 성명서만 낭독했다면, 그리고 말로만 세상의 평화를 선포했다면 그는 아마도 암살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군사정권은 단지 대주교의 의례적인 발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엘살바도르의 농부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거리행진을 했으며, 구속된 사제들을 위해 감옥에 찾아갔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주교들에게 지원과 연대를 호소했다. 그렇게 로메로의 권력의 표적이 되어갔고, 마침내 죽음으로써 고난받는 민중 가운데 십자가를 걸머 진 살아있는 예언자의 상징이 되었다. 

▲ 엘살바도르 한 마을 벽에 그려진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십자가로 돌아가는 '작은 길'

미국 시애틀의 레이먼드 헌트하우젠 대주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1981년에 미국의 핵무장에 대한 저항으로 소득세의 50%를 납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워싱턴 세무당국은 세금 보이코트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고, 세금 거부에 대해 매년 1만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헌트하우젠 대주교는 자신의 행위는  철저한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것이며, 어떠한 처벌도 받더라도 자신의 양심을 따르겠다고 밝혔다. 인디애나 주의 노틀담대학교에서 헌트하우젠 대주교는 강연을 통해 "핵무장은 그리스도를 전세계적으로 못박는 일"이라고 비난했으며, 자신이 소득세 50%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십자가로 돌아가는 작은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텍사스의 메티슨 주교 역시 중성자탄을 제조하려는 레이건행정부의 결정에 대해 의미잇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메티슨 주교는 자신의 교구에 있는 텐텍스 무기공장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단행할지 여부를 심사숙고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는 교회의 최고성직자가 신자들에게 종교적인 이유에서 핵무기 생산을 거부하라고 요구한 최초의 행위였다. 이후 텍사스의 12명의 주교들이 메티슨 주교의 요구를 지지하고 나섰다.

교회는 국가권력이 제공하는 특권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지난 3월 12일 주교단이 2010년 춘계 주교회의를 마치면서 4대강 개발에 강력히 문제를 제기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춘계 총회에 모인 한국 천주교의 모든 주교들은 현재 우리나라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이 이 나라 전역의 자연 환경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것으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주교단은 "우리 산하에 회복이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대규모 공사를 국민적인 합의 없이 법과 절차를 우회하며 수많은 굴삭기를 동원하여 한꺼번에 왜 이렇게 급하게 밀어붙여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다"며, "경솔한 개발의 폐해가 우리 자신과 후손에게 지워질 때, 이 시대의 누가 책임을 질 수 있겠냐?"고 항변했다. 이어 "정부 당국자들과 국민 모두가 우리 자신과 미래의 세대에게 책임 있고 양심적인 길을 택할 수 있기를 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천주교 사제 1,100명의 4대강 개발을 반대하는 선언이 있었으며, 연일 양평군 두물머리에서는 생명평화미사가 봉헌되고, 전국 각지의 4대강 공사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와 정정길 대통령실장 등 여권 수뇌부가 지난 3월 22일 서울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서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천주교 쪽을 성토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날 정 실장은 "천주교 쪽은 반대하려고 작정하고 나선 사람들"이라고 말했으며, 일부 참석자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천주교가 야당, 시민단체와 함께 일종의 공동전선을 펴는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고위당정협의회엔 안상수 원내대표와 최고위원 등 한나라당 지도부와 정운찬 국무총리, 몇몇 부처의 장관들, 박형준 청와대 정무수석 등 4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 로메로 대주교
이 마당에 한국교회에 로메로 대주교 같은 이가 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 본다. 4대강 개발의 폐해에 대해 주교들이 그만큼 절박하게 느낀다면, 주교회의를 마치며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난 춘계 주교회의에서 주교단은 교회 안에서 조직적인 생명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교구와 본당에 생명위원회를 설치하고, 3개 전국 단체(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 한국가톨릭여성협의회, 한국 레지오 마리애)와 협력하여 대사회 생명운동과 전국 생명대회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4대강 개발의 심각성을 고려한다면, 실제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다. 

지난 1984년에 주교회의는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을 기념해서 모두 12개 사목회의 의안을 확정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사문화되었다. 또한 지난 2000년을 전후해 각 교구마다 교구시노드를 열어 시노드문헌을 작성했지만, 결국 말잔치로 끝나버렸다는 평가가 많다. 따라서 4대강 개발에 대한 이번 주교단의 담화문 역시 의례적인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담화문 내용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교구장 주교들은 교구 차원에서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고, 교구민들에게 적극적으로 4대강 개발의 문제를 알릴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6월 선거에서 의미있는 영향력을 끼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목헌장>에서 가르치는 다음 구절은 우리시대에 더 절박하게 다가온다.

"교회는 국가권력이 제공하는 특권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정당한 기득권의 행사도 교회 증언의 성실성이 의심을 받게 한다든지 또는 새로운 생활조건이 다른 규범을 요청할 경우에는 정당한 기득권의 행사도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언제나 어디서나 참된 자유를 가지고 신앙을 선포하고, 사회에 관한 사회교리를 가르치며,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직무를 지장없이 수행하고,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경우에는 정치질서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7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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