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미사는 아주 특별했다. 우리 학교 신부님이 코로나에 걸려서 줌으로 들어오시고,  결국 미사 진행하는 대학원생, 음악 반주자, 나와 학생 여섯 명만 달랑 성당에 모인 것이다. 어디가 미사의 중심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제가 미사를 진행하는 곳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일까? 가상 공간에서 빵이 성체로 변화하는 순간을 집중하면서,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무언가 초대 교회 같은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당연하게 여겨지는 미사의 풍경이 사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이 천년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통틀어서 사제가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성찬제를 거행하고, 신자들은 그곳에 와서 미사에 참례하는 이런 형태의 신앙 생활을 누린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교회만 해도, 초창기 박해 속에서 우리 선조들이 지키신 신앙 공동체를 생각해 보면, 사제 없이 드리는 공소 예절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것이 다 차려진 미사에, 그저 참례만 하면 되는 교회 공동체가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신앙을 살아 내기 위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하늘 아래 으레 그러려니 하고 당연하게 여길 일을 하나도 없다는 점일 것 같다.

무언가 어색한 미사에 나온 학생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를 켜니, "당신이 그렇게 위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누구도 위대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일런 게일(Elan Gale)과의 인터뷰가 흘러나온다. 그는 우리의 삶이 영웅일 수도 없고, 영웅일 필요도 없다. 때로 누군가 자기의 틀에서 착각을 할 때, 그것도 그냥 보아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너무 이해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현대를 사는 지혜가 아니겠냐고, 이야기했다. 변화의 시대,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자의 차이를 받아들여 주는 능력이 중요할 것 같다. 어떤 형태의 삶이 우리에게 도래하더라도, 받아들이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갈 내일은 아주 잘나지는 못한 사람들이 서로서로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이면 좋겠다. 무한 경쟁으로 상하는 일 없이.&nbsp;©박정은<br>
우리가 살아갈 내일은 아주 잘나지는 못한 사람들이 서로서로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이면 좋겠다. 무한 경쟁으로 상하는 일 없이. ©박정은

미사 중 읽은 첫째 독서는 시리아의 장수 나아만의 이야기였다. 나아만 장군은 병을 낫기 위해, 어떤 힘든 일도 다 해내리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영웅적 행위를 통해 병의 치유라는 초자연적인 경험을 거머쥐고 싶었다.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어쩌면 가장 힘든 일은 초라한 일상 속에서 값싼 은혜를 찾아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성사를 보면, 영성 훈련을 통해 하늘나라를 찾는 데 열심한 사람들이, 은총에 대한 본질을 놓치는 우를 범한다. 어쩌면, 무한 경쟁 속에 쟁취하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자본주의의 논리로 우리는 하느님의 맘을 재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보통의 찌질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다고 하면 배가 슬쩍 아파지며 어이가 없어지는지 모른다. 그래서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하라고 제자들에게 일렀다. 

그럼, 뭐 그렇게 특별한 것이 없는 내가 무언가 놀라운 일이 생겼음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복음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아만의 이야기와 대조를 이룬다. 기대하지 않은 어떤 은혜를 우리가 체험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께 찾아와서 참 고마웠다고 말한 사람은 열 명 중 단 한 사람이었다고 복음서는 이야기한다. 왜 다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을까? 이 한 사람은 영웅일까? 왜 아홉 명은 함께 오지 않았을까? 같은 자리에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누구보다 친한 친구들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나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병이란 병의 가장 치명적인 점은 사회로부터의 소외다. 열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서로의 아픔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 자기가 병에 걸렸는지, 그래서 얼마 동안을 이렇게 외롭게 자기 공동체를 떠나 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모두가 함께 병이 나았다. 

성서는 마치 예수님께 돌아온 한 사람이 대견한 듯이 적었지만, 난 항상 이 대목이 아쉽다. 그 한 명도 다른 아홉 명과 함께 있는 것이 맞지 않을까?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이 길로 당장 가서 사제에게 너의 몸을 보이라” 하셨다. 그러니까 그중 어떤 사람들은 사제에게 보이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기의 아름다워진 몸을 볼 생각도 못하고 그냥 열심히 사제를 찾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을 뵌 그 사람들이 그저 그냥 흩어져 갈 것이 아니라,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서로 돋아난 새살을 알아주면 좋지 않았을까? 그리고 모두 함께 가서 사제에게 보이고, 다 같이 예수님께 돌아오던가, 아니면 다 함께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사제에게 보이러 갈 수 있지도 않았을까? 굳이 나머지 아홉 명은 시험에 실패한 패배자의 느낌을 살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기대하지 않게 다가온 은총을 함께 경험하는 벗들과 함께, 감사 인사도 함께 드리러 가면 좋겠다. 나머지 아홉 명의 친구들과, 새로 돋은 새살을 함께 기뻐하면서. ©박정은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도 그렇데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그저 다른 사람이 경험한 대단한 기적을 함께 놀라워하면 될 것 같다. 나는 이번 주말에 한국과 미국, 그리고 홍콩에 살아 있는 아름다운 여성들과 영성 수업을 했다. 그들도 나도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들, 고통을 정직하게 마주한 사람들, 그렇게 영성적인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만나고 있음을 감지한다. 그래서 공자의 말씀처럼, 내가 그들을 못 알아볼까 봐 두렵고 떨리는 맘으로 그들을 만나고 싶다. 이 여성들과 함께, 공동체로서 서로 치유된 새살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새로운지, 알아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손이 얼마나 섬세하고, 또 다정한지, 함께 알아보고 싶다. 

학교에서도, 내가 좋은 선생이라는 것을 못 알아보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 없이, 그들이 얼마나 좋은 학생인지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선생이어야 한다. 그래서 성체 조배를 드리면서, 예수님께, 디에고는 너무 착하고요, 마리아는 너무 똑똑해요, 이렇게 알려드리고 싶다. 특별히 오늘 밤에는, 예수님께, 여성 영성 공부하는 학생 서른 명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해 드리고 싶다. 예수님, 이 자매는 너무 아름답고요, 저 자매는 꽃 향기가 나요. 이렇게 말이다. 여기저기 서로를 알아보아 주는 공간들이 피어나면, 그다지 훌륭하지 않는 내가, 그리고 그대가 그 속에서 다 함께 편안하게 성장할 것 같다.

내가 사는 오크랜드는 글자 그대로 하면 도토리나무 마을이다. 툭툭 떨어지는 도토리를 보면서, 늘 만나는 사소한 도토리지만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도토리를 알아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박정은
내가 사는 오크랜드는 글자 그대로 하면 도토리나무 마을이다. 툭툭 떨어지는 도토리를 보면서, 늘 만나는 사소한 도토리지만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도토리를 알아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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