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항공을 타고 도착한 호찌민의 새벽은 오히려 한국보다 서늘해서 깜짝 놀랐다. 사람으로 숨 막힐 듯 북적일 거라고 기대했던 공항은 매우 한산했고, 마중 나온 수사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 보였다. 한여름을 쉬지 않고 달리다, 멈추어 선 것 같은 신학원의 고요한 리듬 앞에서, 난 처음으로 쉼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이번 여름, 쉬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은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몽생미셸’ 수도원에서 보낸 사흘, 그리고 지금 이곳 베트남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보내고 있는 열흘이다.

뜻밖에 며칠 머무르게 된 몽생미셸에서는 매일 수도원에 올라가서 저녁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는 기쁨이 있었다. 기도 시간, 수도자들이 바치는 성무일도 노래가 너무 좋아서 혹시 제가 말년엔 관상 수도원에 가기를 원하시냐고 하느님께 여쭈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단호히 말씀하는 것 같아서, 그냥 며칠간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온종일 수도원 주위를 걷고, 하느님을 생각하고, 내 영혼이 누리는 자유에 감사하면서, 그동안 지친 삶에 대한 위로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몽생미셸 수도원. 장구한 세월만큼 곳곳에 베인 생의 이야기들이 바람에 흐르고, 고즈넉한 저녁 기도는 우리 삶의 저녁을 생각하라고 재촉한다. ⓒ박정은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몽생미셸 수도원. 장구한 세월만큼 곳곳에 베인 생의 이야기들이 바람에 흐르고, 고즈넉한 저녁 기도는 우리 삶의 저녁을 생각하라고 재촉한다. ⓒ박정은

그리고 이번 여름 일정의 마지막인 베트남. 베트남으로 오던 날, 난 너무 지쳐서,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들었다. 베트남에서는 모든 일정이 일찍 시작된다. 새벽 다섯 시에는 종이 끝없이 울리고, 닭들이 목청을 돋우어 울어대고, 개들도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짖어대며, 비가 내리는 아침이면, 개구리도 장난 아니게 울면서 뛰어다닌다. 그래서인지 일어나는 것이 하나도 힘들거나 짜증스럽지 않다.

베트남의 일정은 함께 미사 드리고, 묵상하면서 시작된다. 수업은 아침 7시 45분부터 11시까지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맘이 너무 귀해서, 올해는 내가 수업하고 싶은 내용을 줄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기로 했다. 내가 해마다 여름이면 가르치는 수업은 “성과 영성”인데, 그들의 진지한 나눔은 울컥울컥하게 하는 감동을 준다. 학생 세 명은 태국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와서, 갑자기 영어로 수업을 들으니 힘들다고 걱정했는데, 막상 토론이 시작되자 가장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어서 신기했다.

이번 열흘은 새로운 곳을 구경한다든가 하지 않고, 그저 수업에 집중하고, 신학원 시간표를 충실히 따라가기로 했는데, 내가 한 일 중 참 잘한 일인 것 같다.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는 시간에 낮잠을 자는 이 평범한 일상이 너무나 달콤하다. 맛있는 음식을 조금 떼어 강아지들한테 나누어 주는 재미도 쏠쏠하고, 저녁 식사 후 수사님들과 성모님 앞에 서서 바치는 묵주 기도도 좋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에는, 수련소 시절처럼 기타에 맞춰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그간 내 생활에 이런 단순한 기쁨이 많이 빠져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시간을 조각내서 일들을 처리하고, 초대된 공동체에서 피정을 지도하고, 또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 모두, 이 여름 내게 주어진 게 황송하리만큼 행복하고 좋은 시간이었지만, 그저 주어진 시간표를 따라가는 이 단순한 삶의 스타일이 주는 여유, 그리고 여유는 내 맘에 기쁨과 넉넉한 맘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을 누를 길 없어, 나는 칠십인 분의 떡볶이를 만들기로 했다. 많은 사람이 먹는 음식을 요리하기는 처음이어서 부담스러웠는데, 수사님들이 파를 썰고, 마늘도 갈고, 고추장도 저어 줘서, 어려움 없이 만들 수 있었다. 막걸리와 김밥과 함께 식탁에 올렸는데, 매워서 쩔쩔매면서도, 열심히 먹어 주는 모습이 고마웠다.

천국의 아이들: 호찌민 시티 좁은 골목에서 만난 아이들. 적은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아이들 앞에서 내가 부끄럽던 순간. 다정하게 다가오는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박정은
천국의 아이들: 호찌민 시티 좁은 골목에서 만난 아이들. 적은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아이들 앞에서 내가 부끄럽던 순간. 다정하게 다가오는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박정은

주일에는 내 수업에 들어오는 수사님을 따라 가난한 이웃을 찾아갔다. 공기가 통하지 않은 조그만 방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수사님은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사서 비닐봉지에 담아갔다. 아이들은 금방 내게로 다가와서 내 팔을 만져 보고 안겼는데, 무작정 마음을 열어주는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했다. 그런데 한 아이가 기찻길 너머에 파는 밀크티를 먹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도 먹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 사줄까? 아이들의 수는 기적처럼 점점 불어나고 있는데.... 내가 사주어야 하나?’ 등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데 같이 간 그 수사님은 전혀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한 아이에게 약간의 돈을 주며 사 오게 했다. 결국 그 아이는 5개와 잔돈을 가지고 왔다. 내 눈에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웃으면서 나눠 먹고, 지나가는 아이들까지 불러 골고루 나누었다. 나는 왜 이 어린 천사들이 함께 먹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을까? 그리고 아이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한 아이스티는 심지어 남기까지 했다. 그리고 과자와 사탕을 먹은 아이들은 길게 줄을 지어 우리와 함께 걸었다. 마치 어린이 부대처럼. 다른 아이들도 조금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은 나의 손을 잡아 보고, 팔을 만져 보고, 빤히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자고 팔을 끌면, 나는 그 아이 집에 들어가서 인사하고, 또 다른 아이가 자기 집에 들어가자고 하면 또 그 아이 집에 들어가 인사했다. 전기가 끊겼다고 말하면서 웃는 아이 엄마의 얼굴이 무심한 듯, 체념한 듯해서 너무 슬펐다. 그래도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돌아오는 길엔, 연기로 자욱한 사이공의 하늘이 정답다. 천국의 아이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그 애들이 내게 가르쳐 준 하늘나라의 살아가는 법. 작은 것으로 너무 행복하고, 그걸 서로 나눠 먹으면 배부른 하늘나라의 계산법을 곰곰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너무 맑아서, 그들의 맨발이 너무 고와서, 자꾸만 미안하다. 그래서 꼬마 친구들이 가르쳐 준 하늘의 방식을 마음에 새기고, 조금은 덜 미안하게 살아 보겠다고 결심한다. 여전히 난 미안하겠지만....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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