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면 나의 하루하루는 벅찰 만큼 빨리 간다.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 저곳을 가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나의 여름은 지나간다. 코로나로 움츠러 들었지만, 그런 속에서도 조심스럽게 마스크를 쓰고, 반가운 사람들을 여전히 만난다. 그렇게 약간의 위험을 무릅쓴 조우는 더 귀하고, 또 소중한 것 같다.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은, 아픈 곳도 비슷해서, 이맘때 즈음이면, 여기저기 아픈 이야기를 하면서 위안을 느낀다.

언제부턴가 밖에 나오면, 사람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걸음이 멈추어졌었고, 사람들과, 나무들과, 거리의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느라 나의 산책 시간은 길어졌다. 그런데 이번에 특별한 이유 없이 무릎이 아팠고, 급기야 병원에 가야 했다. 너무 많이 걸어서 무리가 왔다며 이제는 조금 걸어야 하고, 조심하라는 의사의 말씀이 내가 느낀 아픔에 비해 싱거워서 웃음이 나왔는데, 그렇다고 치료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걷는 걸음은 느렸고, 느릿한 걸음으로 보는 세상은 또 새로웠다. 지하철역에 어디에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찾아야 했고, 길거리에서 몸이 불편한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유진 상가 앞, 불편한 무릎으로, 긴 횡단보도를 파지를 한가득 담은 리어카를 끌며 천천히 가는 한 여인의 모습도 보이고, 휠체어를 탄 채,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분들의 모습도 눈에, 아니 마음에 확 들어왔다.

그리고 이번 여름,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매우 친절한 것을 보고 놀랐다. 나는 왜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친절한지 영문을 몰랐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경로 우대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이제 나는 노인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게 깍듯하고, 친절했다. 비 오는 날 자기 사무실에서 먼 거리까지 함께 걸어 나와 주었고, 내 시간에 맞추어 주었고, 내가 사는 동네로 달려와 주었고, 미안한 일에 대해서도 사과를 하자마자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다. 미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어서, 아마 나는 내가 늙어가는 것도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늙어가는 사람의 예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늙어가는 제자로 사는 법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나는 늘 부르심과 제자도(discipleship)에 관련하여서는 습관적으로 칠월의 싱그러움이나 봄날 아침의 소풍 길을 생각했었다. 그래서 차림은 늘 가벼운 것이어야 했다. 서클이나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가는 날에는 너무 설레어서 난 칫솔이나, 수건 따위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런 것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마르코 복음의 파견 사화를 묵상하다, 제자들이 꼭 젊은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빵도,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없이 가볍게 떠나라고 하시는데, 그래도 지팡이는 허락하신다. 그러니 나처럼 다리가 아프거나 허리가 아픈 제자들도 길을 떠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도가 꼭 젊은 시절의 꿈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긴 제자들이 은퇴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베드로는 어쩌면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 같다. 성서에 보면, 그는 이미 장모가 있었으니, 결혼한 사람이었고, 많은 예술 작품은 베드로를 노인으로 묘사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는 외젠 뷔르낭의 '부활 아침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인데, 머리를 흩날리며 달려가는 두 사람, 젊은 요한과 늙은 베드로가 대조를 보인다. 전에 이 작품을 보면, 나는 늘 요한을 보았었다. 기도하는 듯 손을 모으고 근심스레 달려가는 젊은 제자를. 이제는 그 곁에 선 베드로가 눈에 들어온다. 머리와 눈썹, 그리고 수염은 반백이고, 머리결은 거칠고 푸석푸석한데,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다. 둥그런 큰 눈만이 젊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아마 세월을 뛰어넘은, 그의 열정일 것이다.

'부활 아침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 외젠 뷔르낭.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부활 아침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 외젠 뷔르낭.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교회가 늙어 간다. 노령화 사회의 교회가 늙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제자들도 늙어간다. 그러니 지팡이를 짚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서로 그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늙은 제자도는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은 돈을 챙기거나,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는 따위의 일은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 사람들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민폐를 끼치라는 걸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어쩌면 많이 가진 사람이 누리는 당당한 그런 태도를 버리고, 가난한 사람이 가지는 불편한 마음,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어 주는 식객의 맘으로, 그 사람 속에 거하는 하느님을 만나라는 뜻 같다.

지난주 나는, 용산에서 가장 낮은 곳, 레미제라블이란 곳에서 강의를 했는데, 벽에 적힌 글귀가 내 맘에 들어왔다: 환대란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고 거기서 그들이 번성하도록 하는 것. 최소한 이제 내 힘으로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자유가 줄어들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만나는 사람 속에서, 그들의 고민와 아픔 속에서 나는 고뇌하는 하느님을 풍성히 만나뵐 수 는 있을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사람들과 마주하면, 그들의 병을 낫게 하고, 기적을 베풀 수는 없더라도, 그들이 늙어가는 내 맘에 머물 수 있는 공간 하나쯤은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여름, 불편한 다리를 끌고 가서 함께 예배한 곳에서 들은 한 여학생의 나눔이 계속 마음에 울림을 준다. 그 예쁜 젊은이는 교회에서 자기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교회에서 버림을 받았다고 했다. 교회를 떠나서 한동안 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 오늘 여기서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얼마나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지를 알았다며 울먹였다. 그래서 내 마음도 울먹울먹했다. 우리의 영혼은 누구나 경배를 드리고 싶다. 우리의 영혼은 미사를, 성찬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내 깊은 곳에 있는 미사를 만난다. 늙어가는 제자로서, 영혼의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지팡이는 짚어도 되지만, 마음은 가벼워서, 어떤 특권이나 기득권을 등에 지는 따위의 주책은 떨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품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경배해야 한다.

영성 공간 레미제라블 가는 벽에 쓰인 글귀. ⓒ박정은<br>
영성 공간 레미제라블 가는 벽에 쓰인 글귀.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