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나서면 온통 연두색 바람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우리 동네를 가로지르는 길은 센트랄 애비뉴인데, 가로수가 양측으로 길게 늘어 서 있다. 나는 이 가로수 길을 통해 시간을 만나곤 한다. 조금씩 푸르러 가던 나무들이 어느덧 초록 터널을 만들어 갈 즈음이면, 내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새 삶을 향해 떠나간다. 팬데믹에 직장 얻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간은 또 어김없이 흘러 새로움을 향해 나서라고 재촉한다. 그런 그들의 출발을 축복하면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성모님을 만난다. 새로운 길에 서 있는 청년 예수를 보는 성모님의 시선을 만난다.

내가 가나를 찾아갔을 때, 처음 가는 이 길을 운전해 가면서, 특히 꼬불꼬불 내리막길을 운전하면서, 누군가의 혼인을 위해 이 길을 가셨을 예수님과 제자들을 상상했었다. 가나라는 동네는 먼지가 많이 나는, 그래서 참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길을 잃은 나는 우연히 조그마한 초등학교 앞에 차를 대고 길을 찾고 있었는데, 그곳 학교 어린이들이 손을 흔들며, 연신 “헬로~”를 외쳤다. 나는 어느 곳에 가든지 초등학교 앞을 참 좋아한다. 그곳엔 어김없이 문방구가 있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과 장난감들이 있게 마련이며,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있어서다. 그리고 선생님인 듯한 한 젊은이를 보았다. 그에게서 초록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예수님이 첫 기적을 베푸셨다는 이 가나에서, 당신의 미션을 막 시작하는 청년 예수에게서도 저렇게 바람이 부셨겠구나. 설레임과 주저함이 교차하는, 그리고 무언가 시작하려는 긴장감 같은 마음의 고운 바람이.

가나의 혼인잔치 교회로 가는 좁은 골목길은 어릴 적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설레는데, 와인과 선물을 파는 조그만 가게가 즐비했다. 이 길에서, 자기의 길을 막 시작하려는 젊은 아드님의 맘에 머무셨을 성모님의 시선이 가까이 느껴진다. 요한 복음 2장에 담긴 이 이야기에는 아들이 가진 깊이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재촉을 담았다. 그런데 이 재촉은 사실 극성스럽지 않다. 그저 아들이 원한다면 잘 할 수 있게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고,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아들의 주저하는 시선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면서 가만히 서 계시는 듯하다.

차를 달려 도착한 조그만 가나의 성당 지하에 놓여진  항아리.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을 알려준 첫 기적이 담겼을  항아리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이 담겼을 것이 틀림없다. ©️박정은

그리고 그 어머니는 아들의 모든 걸음을 함께할 것이다. 각 복음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복음사화들을 종합해 보면, 부활한 예수님은 무덤을 찾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여성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남성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갈릴래아 호숫가에 나타나신다. 성모님을 찾아가신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왠지 좀 섭섭하다. 그런데,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서에 보면, 예수님이 성모님을 찾아가셨을 것을 묵상하는 부분이 나온다. 나는 개인적으로 부활한 예수님이 가장 먼저 달려가셨을 곳은 성모님의 품일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가 계신 곳, 아프고 슬픈 세상 끝 어디에도 이미 성모는 계실지도 모른다.

성모 신심에 대한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고, 거의 미신적일 수 있는 성모에 대한 공경은 현대 신학에서 불편한 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차례 교회는 성모상을 중앙 제대가 있는 곳에 모시지 못한다고 못 박았지만, 사람들의 신심은 결국 성당에서 성모상을 없애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교회를 가든, 성모님은 그곳 사람들의 모습으로, 그곳 사람들의 상처 한가운데서 나타나신다. 미국 대륙의 주보 성인은 과달루페의 성모님이시다. 이 성모님은 멕시코가 스페인의 속국으로 지배를 받을 때, 후안 디에고라는 멕시코 원주민에게 발현하셨다. 아르헨티나의 루앙 성모도 원주민들의 신전에 발현하셨다. 무언가 기를 못 펴는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의 한가운데 다정하게 발현하셨고, 또 발현 하신다.

지난주에 나는 미국 성소 담당 수녀님들께 다문화에 대한 워크샵을 해 드렸다. 그런데 미국 수녀님들에게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온 수녀들의 성모 신심이었다. 엘리지베스 존슨 같은 신학자는 성모를 가장 이상적인 제자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예수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성모님이라기보다는, 예수의 길을 성실히, 묵묵히, 그리고 지혜로이 걸어가신 제자도의 모범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모님의 삶, 특히 이집트에서 이민자로 살았던 망명 기간, 로마의 압제 속에 가난한 팔레스타인의 여성으로서의 고단함, 그리고 제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었던 삶을, 오늘을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해한다.

그러다 보니, 성모 신심은 이런 신학과 좀 안 어울리는 것 같다. 성소자의 성모 신심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추억과 아름다움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물론 묵주기도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이상적인 기도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묵주기도에는 한 사람의 영적인 성장에 대한 추억이 깃들이는 것이 아닐까? 어느 경우가 되었든, 수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지닌 신앙의 추억들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어떤 신심이 미국 수도회의 정서에 맞지 않은다 해서, 다 함께 드리지 못할 기도는 아닌 것이다. 난 사실 여전히 묵주기도를 좋아한다. 학생들과 다 함께 묵주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모두 단순해지고, 자연스러워진다. 이민자 가정의 가톨릭 학생들은 자기의 모국어로 묵주기도를 하는데, 난 그 소리를 사랑한다. 그 말에는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기죽지 않은 진정한 모습이 담기기 때문이다.

성모님에 대한 신학이 발전하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런 신학이 성모님께 대한 미학적 감성을 축소시킨다면 대단히 유감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배제된 신앙은 무엇일까? 키에르 케고르는 아름다움이란 즉각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했다. 우리의 감각와 기억 속에서 의미는 육화된다. 꽃 향기가 풍겨나는 오월의 어느 밤에, 인류의 모성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가난한 자의 부서진 마음 속에 다가오시는 성모님을 묵상하면서, 촛불을 밝히는, 그 밤에, 우리는 사실 성모님을 맛보고 만난다. 그렇게 만난 생생한 성모님의 시선을 기억하며, 나는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며 약간은 머뭇거리는 나의 학생들을 향해 속삭인다. “젊은 그대여, 두려워 말고 세상을 향해 귀한 발자국 내딛으소서. 그러니 두려움과 우울의 장막을 걷고 내일을 향해 첫걸음을 떼소서.” 그대들이 걸어갈 때마다 초록색 바람이 분답니다.

거리는 온통  초록색 바람이 분다. 자기들의 삶을 찾아 떠나가는 젊은이들의 떨림과 설레임, 그리고 용기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박정은<br>
거리는 온통  초록색 바람이 분다. 자기들의 삶을 찾아 떠나가는 젊은이들의 떨림과 설레임, 그리고 용기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것 같다. ©️박정은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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