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 -진보의 역설 - 우리는 왜 더 잘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레그 이스터브룩 지음ㅣ에코리브르ㅣ2007년

200년 전, 조선의 한 청년이 2000년대로 돌아왔다고 가정해보자. 너무나도 달라진 한양의 풍경에 우선 놀랄 것이고, 대형마트에 쌓인 물건들을 보며 다시 한 번 놀랄 것이다. 당시에 목마름은 한 그릇의 냉수나 숭늉으로 간단히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형마트의 음료수 판매대를 보라. 콜라, 사이다, 이온음료 등등 수십 종의 음료들이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내일이면 또 다른 음료가 광고에 등장할지도 모른다. 겨울에도 싱싱한 딸기와 야채가 진열되어 있는 모습은 또 어떤가. 한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나오는 에어컨에 어안이 벙벙해질 것이다. 잔치나 축제일에만 먹을 수 있었던 쇠고기가 즐비하게 걸려 있는 모습에서 조선의 청년은 천국이 따로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물질적 삶은 200년 전에 비해 비교해질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다. 뿐만이 아니다. 소아마비, 천연두, 홍역과 같이 인간을 괴롭혔던 전염병은 거의 퇴치되었다. 항생제의 개발로 감염증은 놀라울 정도로 줄어들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이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20세기 초의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31세였지만 지금은 78세로 두 배 이상이 늘었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연애를 가로막던 반상의 구별도 사라졌다. 백정의 자식 임꺽정도 능력만 있다면 벼슬을 할 수 있다. 첩의 자식이었던 홍길동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적서차별 제도도 사라졌다. “우리 조상 세대에는 사치품이었던 것이 우리 시대에는 필수품이 되었다”라는 간디의 말처럼 예전에는 상층계급의 전유물이던 냉장고나 자동차는 이제 필수품이 되어 버렸다. 휴가 시간은 늘었고, 전화 한 통이면 자정 무렵에도 피자가 배달되고, 홈쇼핑으로 집에서도 옷을 주문할 수 있다. 의지와 돈만 있다면, 자유와 풍요를 누구라도 손 안에 넣을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가, 라는 물음에 “그렇소!”라고 긍정의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국과 유럽연합에서 우울증 환자가 50년 전보다 10배나 많아졌다고 하는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왜 더 잘 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라는 부제를 단, 그레이그 이스터브룩의 <진보의 역설>은 물질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발전했음에도 사람들은 삶이 행복하기는커녕 더욱 불행해지고 있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과연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선택형벌’이 그 하나의 이유다. 관습과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사람들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서 선택해야 할 사항이 많아졌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 때문에 과거보다 사람들은 더 많이 우울해질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특히 과거에 비해 선택권이 넓어진 여성들에게 우울증이 남성들에게서 보다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도 선택에 대한 책임에서 온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합리적으로 선택을 하고 그것을 실천할 의지와 힘이 없는 자에게 자유는 곧 불안인 셈이다.

이웃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는 ‘관계 불안(reference anxiety)' 또한 사람들이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또 다른 이유다.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집이 우리 가족에게 적당한가?‘ 하는 생각을 접고, ’내 집이 이웃집보다 더 좋은가?‘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네가 가진 것에 감사하라.’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아일랜드는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이나 스위스의 절반 이하지만 행복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순위에 올라 있다는 사실은 행복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붕괴에 대한 불안도 또 하나의 이유다. 경제가 붕괴되지 않을까, 자연자원이 고갈되지 않을까, 무정부주의, 테러리즘 또는 환경적 재난이 덮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현대인들은 가장 행복한 현재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많은 것에 대한 기대 또한 불만의 핵심 요소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재 연봉이 연간 5만 달러지만 연간 5천 달러씩 인상하는 조건과 인상 없이 연봉 25만 달러를 받을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경우, 전자를 선택할 때 행복해질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보통 수준이지만 해마다 소득이 증가하면 매년 삶이 이전보다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워지지만, 소득이 높아도 매년 삶이 정체되어 있으면 삶이 작년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매스컴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매스컴은 긍정적인 면은 부정하고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뉴스란 원래 대중들이 가장 위급하게 알 필요가 있는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엘리트 집단은 나쁜 뉴스를 더 좋아한다. 엘리트 집단들은 만약 나쁜 일이 발생하면 그럴 줄 알았다고 단언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될 거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가 위기로 부풀려져야 엘리트 집단이 발전하게 된다는 것도 엘리트 집단이 나쁜 뉴스를 선호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카탈로그로 인한 불안’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설명한다. 과거에는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고급 잡지나 카탈로그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을 보고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고, 아는 것이 병이라던가. 화려한 삶을 보여주는 카탈로그는 보통 사람들이 소유하는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불안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불안’이라는 심리적 매카니즘이 인간의 진화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진화심리학적인 설명도 이채롭다. 웃으며 꽃향기를 맡던 조상들은 맹수에 잡아먹힌 반면,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며 불안하고 걱정이 많던 조상들은 생존가능성이 더 높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들의 설명이다. 아무리 식량을 많이 쌓아놓아도 만족할 줄을 모르며 항상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애쓰던 초기 인간은 살아남고 번식하여 그들의 유전자를 우리에게 물려준 결과 우리는 불만족이라는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성공하거나 소득이 높은 사람들의 신체는 다른 사람들보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인 코티솔을 더 많이 분비한다는 연구결과도 저자는 소개한다.

저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수준이란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이지만 삶에서 의미가 결핍되었다고 느낌에 따라 우리 사회는 ‘물질적 욕구’에서 ‘의미의 욕구’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의미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까.

저자는 최근의 심리학 연구주제인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을 그 대안으로 소개한다. 긍정심리학은 정신이상의 원인을 찾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어떻게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행복은 바이올린처럼 연습을 통해 가능해진다.”라는 영국의 평론가 존 러벅의 말처럼 행복은 삶에 긍정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이 긍정심리학의 핵심이다.

긍정심리학의 대가인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 교수는 조지메이슨대학에서 행복론 강좌를 진행하면서 학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험해보라’, ‘다른 사람을 위한 친절 베풀기를 경험해 보라.’라는 2가지 숙제를 제시했다. 첫 번째 숙제에 대해서는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바다 속에서 남자 친구와 섹스하기’,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 마시기’ 등의 답변이 나왔다. 두 번째 숙제에서는 ‘헌혈하기’, ‘여성보호소에 기증할 의복을 수집하기’, ‘식당에서 웨이터에게 50달러 팁 주기’ 등이 나왔다. 참여한 학생 대부분은 이기인 행동에서보다는 이타적인 선행에서 더 장기적인 만족감을 느꼈다고 한다. <진보의 역설>의 저자 그레이그 이스터브룩은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며 ‘용서’와 ‘감사’가 행복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조명한다. 이타적인 행동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긴요하다는 주장이다.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용서한 사람에게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저자는 하나의 예화를 든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유학을 가 반(反)인종분리정책 운동을 돕던 딸, 에이미가 현지에서 두 흑인 청년에게 살해되자, 부부는 딸이 살해당한 남아프리카로 이주하여 자신의 딸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한다. 그리고 딸을 죽인 두 청년을 만나, 그들이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친구로 맞이하고, 장학재단에서 봉사하게 하였다. 2년 동안 청년들은 부부를 도왔고, 그들은 서로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런 예화를 통해서 저자는 용서하고 감사하는 태도가 분노하는 것보다 훨씬 이롭다는 것을 말한다.

저자는 한때 세계적으로 추앙받았던 잭 웰치 전 GE 회장의 탐욕과 부도덕을 폭로하기도 한다. 2001년 젝 웰치가 GE를 떠날 때 회사는 그에게 매년 900만 달러의 연금과 초호화 아파트, 평생 동안 제트기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마신 술값을 회사가 낸다는 약속까지 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이혼 소송 자료로 법원에 제출한 서류에 의하면 순자산이 4억 5000만 달러(이 금액은 보수적으로 투자해도 매년 약 2000만 달러의 이익을 얻게 된다고 한다.)이지만 매년 자선단체에 단지 300만 달러만을 기부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때 인류의 행복감은 증진될 수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저자는 세계 인구의 5퍼센트인 미국이 세계자원의 25퍼센트를 소비한다는 통계는 미국인이 자원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삶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 자원이 더 증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면서, 미국과 유럽연합이 세계 빈곤을 종식시키기 위해 헌신해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미국과 유럽연합은 역사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기에 그 혜택을 제3세계에 돌려야 하다는 것이다. 또 미국과 유럽 연합이 세계의 빈곤 타파를 위해 헌신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 일이 옳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할지라도 소유에 비례해서 욕망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면 인간은 좀처럼 소유를 통해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설령 유토피아가 도래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미래를 더욱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후손들은 여전히 불평을 늘어놓겠지만 빈곤을 타파하고, 온실가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끌어들이지만 피부에 와 닿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세계화는 모든 지구인에게 유익하다는 저자의 주장 또한 비판적인 검토를 요구한다. 그러나 진정 행복한 삶이 무엇인가를 음미하는 데 <진보의 역설>은 충분히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진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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