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시사비평]

 

▲ 담배를 물고 생각에 잠긴 김수환 추기경 (사진출처/가톨릭신문 1977.7.PDF파일)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놓고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숨을 죽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드디어 김연아가 최고의 기량으로 무결점 승리를 확정지었을 때 우리 국민 모두는 함께 울음을 삼켰다. 그 감격스러움을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들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그 국민으로서 김연아를 배출시킨 기쁨은 월드컵 4강 신화 달성에 못지않았다. 그런 감상에 대해 누가 토를 달 것인가?

그런데 이처럼 기쁜 일을 묻는 기자에게 “정말 아무런 감상 없다.”고 답한 경우를 소개한다. 가톨릭신문 1977년 7월10일자 1면에는 재미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김 추기경이 1977년 5월22일 미국 인디애너 주에 있는 노트르담 대학 졸업식에서 카터 미국대통령과 브라질의 아른스 추기경 그리고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 등과 함께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귀국한 후 인터뷰한 기사에 실려 있다. 이때 김 추기경과 카터 대통령은 인권신장에 공헌했다는 공로로 학위를 수여받았다.

김 추기경은 “학위는 감옥에 있는 분들이 받아야 하는데..... 직위 때문인지, 인권을 위해 공헌한 것도 없는 내가 대신 받은 것 같다. 따라서 정말 아무런 감상이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오히려 미안함과 송구함을 드러냈다. 당시 카터 미 대통령은 1977년 1월에 취임하자마자 인권외교를 앞세우면서 중동평화 정착 노력을 기울이는 등 미국이 세계평화를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는 모습을 보여 세계 각국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카터의 노력은 이후 중국과의 국교정상화, 소련과의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II) 등으로 이어져 세계평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 때문에 2002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본인의 수상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김 추기경은 오히려 카터 대통령이 열광적으로 환영받은 모습과 그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음을 털어 놓았다. 어떻게 보면 김 추기경은 은연 중에 유신헌법 이후 긴급조치 1‧2‧3‧‧‧9호를 남발하며 어두운 공포정치 속에 가려져 있던 박정희 대통령과 평화의 새 날개를 달고 비둘기처럼 날아오르는 카터 대통령을 비교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오바마 대통령의 등장에 우리가 환호했던 것처럼. 실제로 김 추기경은 인터뷰에서 “그렇게 열광적으로 환영받는 대통령!”이란 감탄을 되풀이 했다. 당시 카터 대통령은 국내 인권문제에도 우려를 표명하고, 주한 미군 철수라는 카드를 뽑아 국내 언론에서는 경외심(敬畏心)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폄훼의 대상이었다.

김 추기경은 정치인 카터에 대해 “어떻게 보면 그의 정책이 너무 이상에 치우쳐 현실정치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는 정치가로서는 실패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현실이 그를 못 받아들인다면 인류사회는 불행해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세계를 향해 도덕 인권을 제창하며 그것을 모든 정책의 기본으로 삼겠다고 공약한 카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이란 권모술수가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일 것이고, 그 가치관은 인간답게 사는 세상과 멀어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김 추기경은 주한 미군 철수 문제와 박동선 사건 등으로 인해 국내 신문이 카터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미군 철수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즉 미군이 영구히 주둔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나 철군의 시기가 문제라며 현 시점에서 미군철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의 남북관계로 보아 미군 철수가 남북한 간에 바람직한 대화보다 긴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되면 무력경쟁으로 들어가 잘못하면 무력충돌의 가능성마저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김 추기경은 3‧1 명동사건으로 구속된 문정현, 함세웅, 신현봉 신부 등을 위한 교회 전체의 관심과 기도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몸소 법정에 나아가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국내 인권상황과 정치, 그리고 주한 미군철수문제와 국가안보에 관한 판단은 엄격한 구분과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느끼게 한다.

미국 노트르담 대학이 한국의 인권 신장을 위해 김 추기경과 카터 대통령을 함께 내세운 것을 무겁게 받아들이면서도 카터의 철군정책과 한국의 안보현실을 동일시하지 않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것이다. 김 추기경이 좌우를 넘어서 그리고 보혁을 뛰어넘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냉철한 통찰력과 예지를 겸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점이 바로 우리 사회가 그를 믿고 의지하며 따르도록 만들었던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교회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비난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김 추기경은 “사회는 교회에 대해 ‘윤리적 향상’에 이바지해주기를 기대한다. 따라서 교회는 윤리를 가르치고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하며 이 판단에 정치나 윤리가 제외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개인의 사생활이 정치 경제에 의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정권의 억압에 대해서는 분연히 맞서면서도 국민적 단합을 강조했다. 진정한 의미의 국민적 단합을 위해 단순한 ‘살아남기 주의’ 즉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를 버리도록 호소하고, “양심대로 살고 양심대로 말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성실‧정직‧진실한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추모 1주기를 맞이하면서도 그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추모열기가 지속되는 것은 김 추기경 개인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오늘 우리 사회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참된 지도자 부재현실에 대한 공허감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공허감은 지지율‧시청율‧투표율‧득표율 등 모든 가치 판단을 수치로 계산하는 오늘 우리에게 환호의 ‘감상’도 중요하지만, 정말 아무런 감상도 느낄 수 없는 진짜 ‘위험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소리쳐 깨닫게 해주는 진정한 지도자가 요구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변진흥 (가톨릭대 김수환추기경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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