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희망과 절망의 틈새

이 글은 <가톨릭평론> 31호(2021년 봄)에 실린 글입니다.

오랜만에 한국에 오니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다. 일제 식민지 때부터 단순한 선율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은 노래를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안을 받았을까. 위로란 크고 거창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어릴 적 들은 노래 한 소절, 스쳐가는 선율 한 자락에 하루의 피로가 풀리기도 한다. 트로트와 달리 감추어진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음악이 있다. 클래식과 같은 음악을 감상하려면 최소한의 여유가 필요하다. 한 문화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와 복지가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와 같다. 먹고사는 일은 고단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며 소박한 내일을 꿈꿀 수 있을 때 비로소 즉흥적 위로에서 벗어나 고요히 사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종종 클래식이 어렵다고 한다. 오랫동안 클래식을 공부했지만 나 역시 늘 어렵다. 음악은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클래식은 세상에 어떤 위안이 될까.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은 연주되지 않으며, 소비되는 음악은 대부분 100-200년 전에 쓰인 곡들이다. 사람들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음악 속에서 기쁨과 안식을 찾고 있다. 그 음악은 깊고 넓지만, ‘테스 형’처럼 뜨겁게 우리를 감싸주지 않는다. 현대 클래식 음악이 외면받는 이유는 내부로부터의 분열 때문이다. 근대적 이성중심주의가 붕괴하며 전통적 음악 형식, 기존의 조성음악(調性音樂) 역시 해체되었다.

‘테스 형’처럼 감칠맛이 나진 않지만, 해마다 봄이 되면 하이네의 시 16편에 슈만이 곡을 붙인 연가곡 '시인의 사랑'을 듣는다. 클래식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의 로맨틱한 러브스토리를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슈만과 클라라의 극적인 결혼,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애절한 순애보 등 시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과 아름답고 총명한 한 여인의 로맨스는 시공을 초월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실과 진실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힘은 언제나 강력하다. 극적으로 클라라와 결혼에 성공한 해인 1840년, 슈만은 140여 편의 가곡을 작곡한다. '시인의 사랑'은 그중 대표적인 곡이다. 첫 곡 '아름다운 5월에'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너무나 아름다운 5월에

모든 꽃봉오리가 피어났을 때

내 마음속에는 사랑이 피어났네

너무나 아름다운 5월에

모든 새가 노래했을 때

나 그녀에게 고백했네 내 그리움과 열망을

 

슈만과 클라라. (1850) (이미지 출처 =&nbsp;<a data-cke-saved-href="https://creativecommons.org/publicdomain/mark/1.0/deed.no" href="https://creativecommons.org/publicdomain/mark/1.0/deed.no">Public domain</a>)
슈만과 클라라. (1850) (이미지 출처 = Public domain)

슈만은 이 시에 올림 바단조 음계를 사용한다. 모든 언어에 문법이 있듯 음악에도 고유한 법칙이 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각각의 음에는 그 음에서 시작되는 배열, 즉 음계가 있는데, 파#에서 시작되는 단조(어두운 느낌)의 음계를 올림 바단조라 한다. 음계는 필연적으로 해결 음(음계의 첫째 음)을 지향하는데, 슈만은 이 곡에서 의도적으로 해결 음을 회피한 채 같은 패턴을 반복하다 미해결로 끝맺는다.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 해소되지 않는 음악은 봄날 같은 사랑에 대한 아련한 동경을 떠오르게 한다. 슈만의 작품에는 화성의 변화가 촘촘하게 엮여 있어 감정선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 '아름다운 5월에' 역시 가사와 선율은 희망으로, 미해결 화성이 반복되는 피아노 반주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장조와 단조,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교차, 미해결 화성의 반복 등은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기 위해 즐겨 쓰던 기법이다.

클래식 역사에서 베토벤에 의해 정점을 찍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는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사회적 혼란을 겪으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시의 혼돈과 고통을 슈만은 음악뿐 아니라 삶 전체로 보여 주었다. 1856년 46세가 된 슈만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친다. 많은 이가 슈만의 음악 속에 침잠된 불안의 원인을 그의 정신병력에서 찾는다. 인간의 정신에 고정된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이 예측 가능한 결과를 산출한다는 사고방식, 살아 움직이는 현상을 실증적인 사물로 환원하려는 근대적 세계관이 투영된 것이다. 예술작품은 개인의 창작물이기 전에 예술가를 통해 드러난 한 시대의 표상이다. 예술작품이 고전이 되는 것은 드러난 시대정신 안에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보편성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슈만의 음악에는 근대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기 속에서 고뇌하는 영혼이 있다. 동시에 빛과 어둠,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라는 이원성의 거대한 폭풍우에 맞서는 강인한 영혼이 있다.

불안정한 조성, 구원이 약속되지 않은 유배지에서 봄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5월에'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봄'처럼 화사하고 따뜻하지 않다. 사랑을 노래하지만 동시에 어둠과 좌절이 도사리고 있다. 1분 남짓한 시간 속에 희망과 절망이, 노래와 피아노 반주를 통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있다. 그리고 그 틈새에는 차마 희망이라 부를 수 없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다.

밤하늘의 별 같은 희망을 어떻게 한 올 한 올 풀어낼 수 있을까. 주변에는 이미 너무 많은 희망의 언어가 휴지 조각처럼 널려 있는데, 무엇을 덧붙일 수 있을까. 원고 청탁을 받고 잠시 고민이 되었다. 마침 해외입국자 자가격리 중이라 느긋하게 '시인의 사랑'부터 들었다. '아름다운 5월에'의 구조를 '시인의 사랑' 전체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16개의 이야기가 기쁨과 고통, 공(空)을 말하며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구조는 우리네 인생과도 닮은 듯했다. 상반된 것이 모여 하나를 이루지만, 하나도 아니며 역시 둘도 아닌(不一不二) 그 모습은 주위를 둘러보면 어디에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묵묵히 주인이 맡긴 밭을 갈며,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면 되지 않을까. 희망이든 절망이든 뭣이 중하겠는가.

 

신은주

대학에서 피아노와 철학, 종교학을 공부했다.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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