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시사비평-변진흥]

▲ 일간신문에서는 앞다퉈 아이티 문제를 다루었다.

7.0이라는 숫자로 표시된 아이티의 강진은 인류 종말의 예표인가? 아니면 인류 역사에 잊혀졌다가 발굴된 마야문명이나 잉카문명처럼 한 순간에 사라졌던 인류 역사의 한 편린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 엄청난 비극과 혼돈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신에 대한 두려움과 운명의 끝자락을 보는듯한 공포의 전율을 느낀다. 지구촌시대를 실감케 하듯 실시간 중계로 끝없이 전해지는 수많은 주검과 살아남은 자들의 절규, 또다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가선 자들의 몸짓으로 터져 나오는 약탈, 소요 그리고 폭동의 거친 숨결이 우리 영혼의 목을 죄어오는 느낌이다.

왜 이들에게 이러한 천재지변이 닥쳤을까? 프랑스 식민지 치하에서 노예들의 혁명으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던 카리브해의 천국이 어째서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변한 것일까? 이를 단순히 자연의 재해로만 보기는 어렵다. 인구 900만의 70%가 하루 2달러 미만의 생활을 하는 최빈국 아이티로서는 스스로 지진에 대비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단적인 예로 불과 15년 전인 1995년 1월17일에 일본 고베에서 발생한 지진도 7.0의 강진이었지만, 이처럼 10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 십 만에 이르는 부상자 그리고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300만 명 규모의 난민 발생과 같은 참담한 비극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또한 오늘 우리가 TV화면을 통해 보는 것과 같은 아비규환의 소동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더욱이 미군이 만 명이 넘는 정예군을 보내고, 한국까지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사태에 이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질서유지와 구호 그리고 지원을 위해 파견된 미군을 점령군으로 빗대는 국제질서의 혼돈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아이티는......?

한 일간지는 ‘비운의 아이티, 그 운명은 미국의 탐욕이 키운 것’이라고 질타했다. 미주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 공화국으로 독립한 아이티가 독립투쟁사와는 어울리지 않게 ‘실패한 국가’로 전락한 원인을 서구 열강의 탐욕스런 침탈과 특히 20세기 이후 군사개입과 점령을 반복하며 오락가락했던 미국의 정책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중동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처럼 미국의 입맛에 맞는 독재자 선택과 버림이 정치혼란을 가중시켰고, 독립이후 34번에 걸친 쿠데타를 겪으면서 거의 해마다 찾아오는 허리케인 피해로 반복되는 환경재앙 속에서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정치 사회 경제 인프라 구축은 아예 기대하기조차 어려웠던 셈이다. 여기에 덮친 7.0의 강진, 이것은 이들을 둘러싼 그 모든 재앙이 겹쳐져 터져 나온, 오늘 이 시대, 그 인간적 불의의 표징인 셈이다.

아이티는 가톨릭국가이다. 국민의 90%는 가톨릭, 10%가 개신교 등이다. 바로 옆의 국가인 도미니카공화국은 98%가 가톨릭이다. 그러나 이 두 국가는 마치 남북한처럼 앙숙이었다. 이 세기말적 비극사태를 맞이하여 비로소 두 국가의 대통령이 서로 만나고, 도미니카의 국경을 개방했다는 보도를 바라보면서 전혀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대통령 궁과 함께 붕괴된 대성당의 잔해 속에서 발견된 조지프 세르주 미오 대주교의 시신이 그의 집무실 의자에서 앉은 채로 발굴된 모습 역시 충격적이다.

기원전 8세기경 유다 임금 우찌야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 아모스는 지진으로 벌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했다. 구약의 아모스서에 나타난 지진 이야기는 이것이 단순히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재해에는 늘 상징적이고 신학적인 의미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인간에게는 안전한 피난처로 보이는 것들 즉 집과 궁전 그리고 성전마저도 언제까지나 견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언젠가는 무너져 내려 하느님의 참 주권이 드러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예언자 아모스 시대에 유다 주변에는 남쪽으로 에돔, 북쪽으로 이스라엘, 사해 동쪽으로 모압, 암몬, 서북쪽으로 티로와 시돈, 동북쪽으로 다마스쿠스 등이 있었다. 이때 아모스는 지진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주님께서 시온에서 호령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큰 소리를 치시니 목자들의 풀밭이 시들고 카르멜 꼭대기가 말라 버린다.”(1,2)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유다뿐 아니라 유다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 예를 들면 다마스쿠스·가자·티로·에돔·암몬·모압·유다·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벌하신다는 것을 예언했다.

그 죄악들은 “칼을 들고 제 형제를 뒤쫓으며 동정심마저 버린 채 끊임없이 화를 내고 줄곧 분노를 품었기 때문”(1,11), “저의 영토를 넓히려고 길앗 여자들의 임신한 배를 갈랐기 때문”(1,13), “에돔 임금의 뼈를 불살라 횟가루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2,1), “주님의 법을 배척하고 그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으며 저의 조상들이 따라다니던 거짓 신들에게 홀려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2,4),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2,6) 등이다. 결국 하느님은 인간들이 옳게 행동할 줄 모르고 “자기들의 성채 안에 폭력과 억압을 쌓아 올리는”(3,10) 것을 보시고, 지진으로 그 성채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주님의 분노 앞에 과연 ‘성한 자’로 남아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 안에 쌓여지고 있는 폭력과 억압의 성채는 무엇인지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역시 적대적 관계에 있는 자들의 뼈를 불살라 횟가루로 만드는 만행에 익숙해 있고, 주님의 법을 배척하고 인간의 법과 망루만을 높이 세우고 있으며,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빈곤한 이들을 거침없이 팔아넘기는 폭력과 억압을 쌓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 참사로 불타버린 남일당 망루가 그러하고, 4대강 사업으로 배불리려는 엄존하는 권력의 탐욕 망루가 그러하고, 세종시에 목매다는 권력투쟁의 신기루 망루가 그러하다. 또한 이념의 덫을 놓아 상대가 그 누구든 뼈를 불살라 횟가루로 만들어 버리려는 보수 언론의 폭력이 그러하다.

이 엄혹한 폭력과 억압의 현실 앞에 우리는 과연 무사할 것으로 안심할 수 있겠는가? 아이티의 비극이 산 너머 남의 일이라고, 우리는 지진 안전지대에 살고 있노라고, 그냥 1천만 달러를 지원하고, 평화유지군만 파견하면 된다고 가슴 쓸어내리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시대야 말로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니네베에 “회개하라!”고 외쳤던 요나 예언자의 말에 다시금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닌가 싶다.

변진흥(평화문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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