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시사비평-맹주형]

▲ 사진/한상봉

길을 나섰습니다. 수원에서 남원까지 약 3시간 반, 기차는 가장 느린 무궁화열차. 어느덧 기차는 남원에 닿습니다. 남원종합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가 막 출발하려는 인월 행 버스를 잡아탑니다. 이윽고 인월, 인월은 지리산으로 드는 길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마을이 큽니다. 그 마을에서 지리산 둘레 길에 나섭니다.

인월에서 금계로 향하는 길, 그 초입 중군(中軍)마을을 지나 산길을 오르다 보니 두 갈래 길이 나옵니다. 조금 길이 험해보여도 산속에 있는 암자를 볼 요량으로 황매암 길로 오릅니다. 가파른 산길을 땀 흘리며 오르니 작지만 정갈한 암자, ‘황매암(黃梅庵)’이 나옵니다. 암자 입구에서 목을 축입니다. 목축이며 고개들어보니 둘레꾼들을 위한 글 한편 적혀있습니다.

“모처럼 내 두발로 스스로 나선 길
살아온 삶 진솔하게 돌아볼 순간되고
다가올 인생 새로운 포부 키울 소중한 기회 되시길
숲, 바람, 하늘, 구름
이 우주 온갖 것이 오직 나와 연결되어 있고
비로소 생명으로 빛나고 있음 발견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순간들
오로지 사랑과 연민 나눠야 할 때임을 깨달으시길”


지난 해 우리 사회는 사랑과 연민을 잊었습니다. 숲과 바람, 하늘과 구름이 어우러진 강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잊었습니다. 강을 둘러싼 모든 생명이 우리와 연결되어 모두가 한 생명, 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순리일진 데 그 관계성을 뚝뚝 끊어 강바닥을 긁어내고 그 속살에 콘크리트를 부으려 합니다. 오랜 세월 그 강가에서 강과 함께 농사짓던 농민들을 쫓아내고, 생명의 땅을 파헤쳐 그 위에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 합니다.

지리산 둘레 길 걸으며 구약의 말씀 한 구절 떠올립니다. “이강이 닿는 곳 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에제 47.9) 우리가 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닿는 모든 곳,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우리를 둘러싼 온갖 생명에게 사랑과 연민을 나눠 주는 생명의 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맹주형 (아우구스티노, 천주교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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