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얼마 전 한 일간지에 ‘새천년 열렸어도 평화는 없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21세기 새 천년은 1,2차 세계대전과 동서냉전의 이념적 갈등으로 갈갈이 찢겼던 20세기의 비극을 마감하고 드디어 평화의 새 세기를 열게 될 것이라던 인류의 희망이 불과 몇 년 만에 얼마나 무참히 좌절되었는가에 대한 끝없는 절망감을 이 기사는 너무도 잘 표현해냈다.

과연 다가오는 2010년은 지난 10년의 절망을 새로운 희망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인가. 21세기 평화를 향한 인류의 소망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지난 10년의 열쇳말은 ‘악의 축’이었다. 9.11에 분노한 미국이 2002년 초에 이란과 이라크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테러와의 전면전을 선포함에 따라 21세기는 ‘전 인류의 악’을 제거하는 ‘미국과의 동맹전쟁’에 휘말렸다. 사담 후세인을 제거한 이라크전과 알 카에다를 소탕한다는 명분의 아프간전쟁으로 점철되었던 지난 10년을 마감하고, 이제 새롭게 2010년대를 맞이한 오늘의 인류사회가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금 평화를 향한 희망의 불을 지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미국의 저명한 대외정책 전문가 월터 러셀 미드는 ‘악의 축’이란 용어를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이 1656년부터 이미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당시에 크롬웰은 스페인을 악의 축 세력으로 규정했고, 그 후 악의 축은 프랑스로, 나폴레옹으로, 히틀러의 나치즘으로, 소련으로 바뀌어갔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과 미국으로 대변되는 두 앵글로색슨 강대국이 1688년의 명예혁명 이후 지난 300여 년 동안 무패의 전쟁을 치러오면서 점점 자신들의 힘과 군사적 승리가 세계를 위하는 것 즉 정의를 세우고 세계평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앵글로아메리카 권력을 뒷받침하는 기술과 상업의 발전이 민주주의적 자유와 합쳐져 보편적 평화의 길을 이끌 것이라고 보았던 알프레드 테니슨의 신념은 연합국의 승리와 유엔의 창설로 이어져 세계평화와 민주화의 가치를 필연적 현실로 구체화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필연적 현실은 미국의 가치와 이익이 하나로 부합되게 만들었고, 앵글로아메리카 권력에 의해 세계를 지도하는 책무가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세계질서의 구축으로 현실화된 것임을 월터 러셀 미드는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도다](2009, 김영사)에서 간파하고 있다.

2010년은 이런 저런 논의를 떠나서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왕조의 몰락으로 초래된 국치(國恥) 100년이 되는 해이고, 6.25 동족상잔의 비극 60주년, 4.19의거 50주년 그리고 6.15 남북공동선언 10주년 등 한국현대사의 굵은 마디를 이어온 역사의 거친 숨결이 모아지는 해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가오는 2010년이 과연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줄 것인지 소박하게나마 진지한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거시적 관점에서 또한 한반도의 외부환경을 놓고 보면 앵글로아메리카 권력에 의해 지탱되는 세계질서의 얼굴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비관적이다. 10년쯤은 후에 타게 될, 그것도 잘했어야 자격이 인정될 노벨평화상을 앞당겨 수상한 오바마가 앵글로아메리카 권력의 얼굴을 ‘인간의 얼굴을 한 문명’의 형태로 바꾸어 놓는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희망을 엿보게 되겠지만, 그런 노력보다는 3년 뒤의 재선에 더 마음을 쓰게 될 오바마에게서 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오바마에게서 고르바쵸프의 슬기와 용기를 구하고 싶은 사람들의 가슴이 더 답답하게 되지나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안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어설프게나마 민주주의의 싹을 키우는 선거를 시장바구니보다 천시하면서 그 과정도 결과도 돌아보지 않은 무심한 우리의 현실이 지난 100년의 깊고 큰 상처를 치유할 희망의 단서를 과연 찾아낼 수 있을 것인지..... 좀처럼 기대하기 힘들다. 이미 몸과 마음은 가계 빚을 돌려막는 생활전선에 가로막혀 꿈도 이상도 잃은지 오래이고, 대대손손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과 강 그리고 바다마저 앵글로아메리카 권력을 답습하는 신자유주의에 맡겨 파헤치고, 물을 가두고 막고 오염시키는 천박한 상업주의에 매몰되어가는 세태의 흐름마저 방관하는 지친 몸과 마음으로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상한 역사의식과 선열의 정신 그리고 민족의 화해를 부르짖는 세찬 열기가 더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또한 천만 명에 달한 원혼이 오열하는 6.25의 아픔과 초중등학생까지 총구 앞에 쓰러져 피를 흘리던 4.19의 깊은 한숨소리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오늘 우리 사회를 새롭게 바꾸어나가려 하는 역사쇄신의 쇳소리를 기대하기도 힘들 것 같다.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가정도, 학교도, 사회도 모두 제 자리 지키기보다는 남의 것을 차지하고, 넘보고, 샘내는 것에 익숙하고, 올바른 가치와 올바른 사람, 지도자를 세우고 지키기보다 헐뜯고 흉보고 상처 내어 피 흘리는 것을 보고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내 잘못’을 탓하기보다 내 주위에서 ‘악의 축’을 만들어 쓰러뜨리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반만 년의 역사 속에 간직되어온 가치를 도외시하고, 앵글로아메리카 권력에 빌붙어서라도 잘 살기만 하면 된다는 현세주의를 부추겨온 때문이 아닐까 싶다.

1989년 8월15일에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던 임수경은 분단선에 서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바쳤다. 이 모습은 북쪽 사회에도 생중계되었다고 한다. 진정한 평화는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진정한 관용으로부터 시작된다. 2010년 새 아침이 이처럼 진정한 관용의 문을 여는 새 희망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해본다.

변진흥(평화문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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