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방] 목공예가 서정우 가브리엘

 

부천 중앙병원에서 김상식 신부(바오로, 예수성심전교회)를 먼저 만났다. 중앙병원은 산재병원이라 그런지 현관에는 휠체어를 탄 환자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별관 7층 원목실은 작은 성당에 딸려 있는 한 평 반 남짓하는 구석방이었다. 김 신부의 소개로 송내 역 근처 서정우 씨(가브리엘, 43세)가 일하는 공방을 찾았다. 주차장 한켠에 있는 컨센트건물에서 휠체어를 탄 서정우 씨가 일행을 맞아주었다.  

쌓아놓은 나무더미 쪽으로 놓여 있는 주물난로에서는 장작이 타는 냄새와 여린 불빛이 술렁거렸다. 서정우 씨는 몇 달 전부터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요즘은 성물(聖物)만 만들고 있다. 사제가 되기 전에 노동사목 활동가로 일했던 김상식 신부는 유난히 산재환자들에게 애정을 많은 듯 보였고, 중앙병원에서 원목신부와 환자로 만났던 이들은 친구처럼 보였다. 김 신부는 특별히 희랍정교회 미술에 관심을 보여오던 차였는데, 서정우 씨를 만나 성물과 관련된 디자인에서 조언을 해주고 있다. 

서정우 씨는 요즘 안드레아 십자가를 만들고 잇다고 한다. 예수님처럼 곧은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다며 기울어진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던 안드레아를 상징하는 X자형 십자가였다. 서정우 씨는 궁금해 하는 기자를 위해 직접 안드레아 십자가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전기톱으로 십자 틀을 잘라내고, 끌로 다듬고 매만진다. 홈을 파서 무늬를 넣는 서정우 씨의 손길은 날렵하면서도 힘이 들어 있다.

아직은 알음알이로만 성물을 주문제작하고 있는 서정우 씨는, 아직 견본의 가지 수가 많지 않아서 홈페이지를 만들 엄두를 못 내고 있다며, 일반 성물방에 내어놓자니 이문을 40% 이상 너무 많이 떼이기에 주저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품은 대량으로 틀을 찍어낸 뒤에 마무리 공정은 손으로 일일이 다듬어야 한다. 그 수공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유통구조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래도 성물을 매만지는 것은 곁들여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예전엔 그저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는 게 신앙의 전부라고 여겼는데, 종교미술품을 통해 종교 상징과 의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기술을 연마하는데 시간을 온통 빼았겼지만, 이젠 책 볼 겨를도 생겼다.  알아야 면장을 하기에 공부하고, 공부하니 일이 더 흥미롭고 애정이 간다.  

▲ 서정우 씨

금형 노동자에서 화물차 운전사까지..그리고 사고

서정우 씨는 전라도 순창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렇지만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집을 뛰쳐 나왔다. 농사가 싫어서였다. 그가 서울에 와서 자리잡은 곳은 성수동 자동차 용접공장. 그런데 용접으로 얼굴 피부가 벗겨지는 것을 경험하고는 금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금형을 배운 6개월에 만에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서정우 씨는 더 오기가 났다고 한다. 그래서 3년동안 손을 놀리지 않고 금형을 연마해서 기술을 인정받았다. 군대영장을 받고 순창에서 보충역으로 일할 때에도 공장 사장이 나중에 다시 돌아오라며 18개월 동안 용돈을 대줄 정도였다.

그 공장이 어려워지면서 모나미에 입사해서 금형 일을 했는데, 8시 반에 출근해서 5시면 다들 퇴근하고 모여서 술 한 잔 걸칠 사람이 없는 대공장이 싫어서 한 달만에 그만 두고 작은 공장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이주노동자들 두엇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1991년부터 92년까지 금형 일을 했는데, 몇번 부도내서 말아먹고  이번엔 5톤 차량을 구입해서 화물차 운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1996년 10월에 지방에 납품하러 가다가 고속도로에서 차량이 전복되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119구조대의 도움을 받아 어느 개인병원에 실려 갔는데, 상태가 심각해서 대전 중대병원으로, 다시 서울 송파구 중앙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여러차례 옮겨다니는 바람에 밤이 되어 수술은 다음날로 미루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수술비였다. 병원비가 1천2백만원이나 나왔지만, 화물차 전용차선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전세금을 빼서 비용을 치르고, 아이는 외갓집에 맡기고 아내의 간병을 받았다. 수유리 국립재활원에 있다가 다시 인천 중앙병원에 입원했다.

자살시도도 두어 번 했다는데, 다치기 전에 성당에 다녔던 그였지만, 하느님이 원망스러워 성당에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총각 시절에 안양에서 공장에 다녔는데, 그 때 얻어 쓴 월세방 주인 때문에 안양 호계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집주인과 셋방살이하는 이웃들이 모두 신자였으며, 노상 틈만 나면 모여서 삽겹살에 소주 마시다 보니, 성당 가면 예쁜 아가씨도 많다는 꼬임에 넘어가 성당에 다니게 된 것이다. 마침 다니던 공장 주인도 신자여서 교리반을 위해 기꺼이 잔업에서 빼주었다. 사람들 만나고 술 한잔 하는 게 좋아서 레지오 활동도 하고, 이 시기에 결혼도 했다.

사는 게 뭔가, 하고... 

▲ 김상식 신부
심하게 다치고 나서야, 서정우 씨는 사는 게 뭔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야 술 먹는 재미에 성당에 다녔지만, 정말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그때 인천 중앙병원에 있던 원목실을 알게 된 것은 새로운 삶의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원목실을 찾아가 상담도 하고, 한 주에 한 번 미사를 드리고 병원에서 '그림 동우회'도 만들었다. 그가 휄체어를 타고서도 가능한 일이 뭔가 생각하다가 발견한 게 그림이었다.  

한 주에 한번씩 같은 장애를 가진 강사가 중앙병원에 방문해 그림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중 목공예 하는 윤봉기 선생이 중앙병원에 배치되어 그분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 인연으로 시작한 게 목공예다. 목공예는 그림보다 재미있었다. 평소 한 시간 이상 앉아 있기가 힘들었는데, 칼 하나 들고 목공예를 하다 보면 통증도 잊고 몰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서정우 씨는 목공예를 하면서 진통제도 끊을 수 있었다. 반 년 뒤에는 10시간 이상 앉아서 작업할 수 있었다.

서정우 씨는 중앙병원에서 퇴원 후에도 계속 병원 기계실을 빌어 작업을 했다. 전국 장애인 기능대회에 나가 금상을 타기도 하고, 일반인 기능인대회애서도 금메달을 땄다. 장애인 국제대회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그동안 생계와 집안 살림은 온통 아내의 몫이어서 서정우 씨는 항상 아내에게 미안하다. 그 다음에는 콘테이너 박스를 하나 놓고 기능대회 준비반 학생들을 가르치며 용돈을 벌기도 했다.  

나무의 숨결을 성물에 담아

서정우 씨는 요즘 성물 제작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제 다른 차원에서 일을 하고 싶은 열망이 생긴 것이다. 어차피 큰 돈이 되지는 않겠지만, "아침에 일 나갈 곳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고맙다"는 아내의 격려에 힘 입어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서정우 나무공방'을 부천시 원미구 상동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가 목공예를 배우지 않았다면 진통제 맞으며 매일 같이 누워서 텔레비전만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일도 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해야 할 기본은 하고 있다는 생각, 자신이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자의식이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그동안 주로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데만 익숙해졌는데, 이제는 내 생각을 곧추 세우고 싶다"고 말한다. 

목공예는 그가 세상과 인간, 그리고 하느님을 만나는 수단이 되었다. 쇠를 깍을 때에도 쇠 냄새를 맡았다는 서정우 씨는 이제 나무를 만지면서 나무냄새에 취해 있다. "나무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고 만졌을 때 느낌이 부드럽고 감미롭다"고 한다. 내 손으로 무엇인가 만들면서 칼 지나갈 때 나는 소리도 좋고, 나무 타는 냄새도 좋다. 서정우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하느님께서 우리를 빚으시면서 느끼셨을 감회가 어떠 했을 까, 상상해 보았다. 무엇인가 쓸모 있는 것을 만들고, '좋다'하신 소회를 나누어 가진 시간이었다. 아마도 이번 성탄절이 서정우 씨에게도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라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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