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33]

어렸을 때 자주 읽거나 듣던 성경 중에 내내 이해가 안 되던 내용이 있었다. 이사악이 큰아들인 에사오에게 축복하려 했으나 동생 야곱이 눈이 어둡던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챘다는 이야기였다.(창세 27,32-38) 나중에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게 되었다면 다시 에사오를 불러 축복해주면 될 텐데 그것을 돌이킬 수 없다니, 그 축복의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정말 인생의 축복으로 연결되다니 등등, 이런 것들이 내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나중에 종교학적 안목으로 성경을 다시 보고서 “그런 이야기가 형성될 수 있겠구나!” 싶어졌다. 고대인일수록 말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현대인과 사고방식이 많이 달랐다. 고대인에게 말이란 때로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힘이 있는 것이었다. 축복의 말은 그저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좋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하는 힘으로 간주되었고, 저주는 그저 듣기 싫은 몇 마디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위험이고 재앙이었다. 적어도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말은 일단 입에서 나오면,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가지고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는, 그 자체로 힘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다바르’이다. 분명히 발음되고 이해될 수 있는 발언이라는 뜻이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느님은 ‘다바르’를 통해 당신을 계시하셨다. 환상 같은 것은 부차적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다바르’를 맡은 사람들, 즉 ‘예언자’가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바르’에 의한 계시와 ‘접신’에 의한 계시는 구분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다바르에 의한 계시, 즉 예언이 중요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맡아도 인간의 정상적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접신에 의한 계시처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일”(1사무 10,6)이 없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과 의사소통하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힘으로서의 말이 인간 안에 전해질 수 있고, 더 나아가 그러한 힘으로서의 말이 있었기에 그 말의 힘에 근거해 사물도 생겨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은 그저 말씀하실 뿐이었다: “빛이 있어라!”(창세 1,3) 시편33,6에서는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말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주제인 “말이 육신이 되었다”(요한 1,14)는 요한복음의 전언도 이러한 과거의 눈으로 읽을 때 그 의미가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태초에 ‘말’(logos)이 있었다. 그 때의 말이란 신적 이성과 같은 것이었다. 히브리어 다바르가 그리스 문화권에 살던 유대인들, 특히 스토아적 개념에 영향을 받으며 '70인역 성서'를 읽던 사람에게 로고스로 이해되었고, 그 때의 로고스는 세계를 지배하는 신적 이성과 같은 것이었다. 70인역 성서를 읽는 사람은 창세 사건도 그러한 신적 이성이 행한 것으로 여겼고, 시편 104,24에 나오는 “하느님이 지혜로 세계를 창조했다는 가르침”에서의 지혜도 비슷하게 해석했다.

게다가 그리스 철학에서는 신의 초월성이 강조되었는데, 여기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그 초월적인 신과 인간을 연결 짓는 중간 존재로 지혜 혹은 말을 생각했다. 잠언 8,12-31, 지혜서 18,15에 지혜가 인격화, 의인화되어 나타나는 장면이 있듯이, 말(로고스)은 점차 초월적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중재자로 바뀌어갔다. 그래서 유대교 철학자인 필로(Philo)는 하느님은 초월적이어서 그 자체로는 인간과 직접 접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 즉 로고스를 통해서 접촉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로고스를 헬레니즘적 유대인들은 아들, 형상, 그림자, 신으로 부르기도 했고, 인간에게 보내는 하느님의 사자,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대언자(파라클레토스) 등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태초에 말이 있었고, 그 말이 신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육화했고,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을 자신들이 듣고 보고 만졌다거나(1요한 1,1), 백마를 타고 천군을 영도하며 오는 이의 이름이 ‘하느님의 말’이라는 생각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묵시 191,3) 물론 이 때의 말이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그동안 말해온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말이 육신이 되었다고 할 때, 그 말과 육신과의 관계, 더 나아가 하느님과 만물과의 관계이다. 흔히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말을 구름 너머에 있는 어떤 초자연적 존재의 영혼 같은 것이 어떤 인간의 몸속으로 쑥 들어온 것처럼 상상하곤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영혼이 신의 영혼으로 뒤바뀐 것처럼 간주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도 인간 형상을 한 어떤 도예가 같은 이가 진흙이라는 신과 무관한 어떤 질료를 이용해 사람 형상을 쓱싹 만들어놓고는 보이지 않는 원격조종기 같은 것을 써서 멀리서 조종하는 듯한 모습으로 상상하곤 한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수준에서 신에 대한 이해를 시작할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초등생 수준의 신 이해를 넘어, 반드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을 어떤 형상적 존재로 상상하는 순간 하느님과 다른 형상들, 즉 하느님과 사물들 사이는 신 없이 텅 빈 무력한 공간이 되고 만다. 엄청난 우주적 공간이 하느님 없이 하느님 이전부터 존재해온 셈이 되고, 창조자로서의 하느님은 제한된 형상 안에 갇히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신을 어떤 형상적 존재로 상상하다보니, 말로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면서 실제로는 전 우주를 하느님이 없는 무력한 허공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 안에는 신이 없다는 식의 저주도 그런 배경 속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신을 형상적 존재로 상상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여러 종교들을 대하는 신론적 기초 중의 기초이다. 다음 호에는 그리스도교에서는 여러 종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말이 육신이 되었다”는 신앙고백에 대한 해설을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서 이번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찬수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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