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안에 스며있는 하느님]

 

▲ 이슬 진주(이하 모든 사진 - 고태환)

한 주일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쓴 강론을 매주 내게 보내오는 친동생 같은 신부가 있다. 몇 주 전에 보내온 <2009연중 제28주일 강론>의 내용은 요즘 내가 강의 중에 가장 자주 화두로 삼는 것인데 그 일부를 소개한다.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한 인격의 자아는 선과 악에 대한 구별과 판단 기준이 되는 사람들(일반화된 타자 generalized others)에 의해서 많은 영향을 받아 형성된다고 합니다. 즉 부모님이나 선생님들과 같이 중요한 타인을 통해서 한 아이의 내면에 사회적 규범과 가치가 먼저 자리를 잡고 그 위에 자아가 형성됩니다.


또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문제를 늘 의식합니다. 타인들이 어떻게 나를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자신을 평가합니다. 나를 대하는 다른 사람의 태도가 곧 자기를 비추어 주는 거울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추인 모습이 자기자아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의식을 ‘거울에 비친 자아’(the looking glass self)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나 사회적 규범과 같은 일반화된 타자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들에 종속될 가능성이 대단히 큽니다. 


예수님에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도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묶여있기에 예수님을 보자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선한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선하게 보이려는 강박관념에 묶여 있는 그를 도와줍니다.


사실 선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선하게 만들려 하는 데에서 위선이 행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하게 보이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해지면 선한 이미지를 갖추려고 더욱 집착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선한 모습으로 보이도록 늘 가면을 쓰고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기에 선한 것을 선한 것으로 보지 못하고 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의심하고 경계하면서 왜곡합니다.


바오로사도는 로마서에서 자기 내면에 있는 이러한 인간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15.17-19)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사람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다. 선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며,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선하게 보이려는 집착을 버리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을 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들어갑니다. 굳이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선하게 보이려는 강박에 묶여 위선을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게 사람이 지어졌기에 모든 사람이 선합니다. (이상 강론 내용 부분 발췌)

 

 


대전신학교 내 <정하상 교육관>에서 초청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충남 연기군 전의면 소재 성당 앞을 조금 지날 무렵, 한 자매가 손을 흔들며 무작정 차 앞을 가로막고 섰다. 별다른 도리 없이 차를 세우자 조수석 문을 열며 익숙하게 차에 오른다.

“죄송합니다만 큰 길 까지만 좀 타고 가겠습니다. 걸어가기에는 멀어서요.”

늘 있는 일인 듯 자연스러웠고 시골사람답지 않게 세련되고 교양 있는 말씨였지만, 양해를 구하는 마음가짐보다는 기본적인 친절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손에 들고 있는 묵주를 보고 내가 말을 건네었다.

“교우시군요.”
“네. 신부님이신가 봐요?”

“아니예요. 평신도입니다.”

그것이 다였다. 묵주를 쥐고 성호를 그은 다음 한 마디 말없이 그녀는 홀로 묵주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기도를 하겠다’던가 ‘함께 하자던가’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그렇게 이십 여분이 흘렀다.

“저기 보이는 카센타 앞에 세워주시면 됩니다.”

“아, 네. 성당이 그 근처인가요?”

“아니요. 아까 탔던 곳이 성당 앞인데 주일미사를 보고 돌아가는 길이예요.”

또 그것이 다였다. ‘안녕히 잘 가세요’라던가 ‘주말이어서 길이 많이 막히니 조심운전을 하시라던가’ 등의 인사내용은 다 생략되었다. 그녀가 함께 타지 않았어도 어차피 나는 그 길을 가야했으니 고마워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그녀와 헤어져서 꽉 막힌 지방도로를 느리게 운전해 가면서 꼬리를 물고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기도를 했을까? 자신을 직접 도와준 운전자인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새기는 것에는 건성인 채, 오히려 진심으로 고마운 분은 자신이 믿거나 공경하는 대상은 아니었을까?

‘성모님. 돌아오는 길을 편안하게 잘 살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느님. 이렇게 꼭 필요할 때 사람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더 나아가 기도를 시작할 때의 심정이 혹시 이렇지는 않았을까?

‘성모님. 이 운전자가 제발 안전운전을 하여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보호해 주셔요. 주님. 당신만을 믿고 의지하오니, 제발 이 운전자가 나쁜 사람으로 돌변하여 나를 해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그 때 나는 구겨진 채 후줄근한 계량한복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으며, 가는 길에 먹으라고 교육관 수녀께서 주신 머루포도를 먹으며 가던 중이었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포도가 담긴 접시를 한 손에 쥔 채 운전하는 모습이 그녀를 평안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리 양해도 구했었다. 신부로 잠시 착각한 것은 목에 걸린 십자가와 그곳이 대전신학교 앞이었다는 것뿐이다. 사정이 어찌되었거나 우리가 함께 안전하기를 기대한다면 기도에 우선하여 운전자를 기쁘게 해줘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나 홀로 기도’는 스스로의 안녕에 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로사리오 성월이니 별 다른 생각 없이 의례적인 묵주기도를 했기만을 바라면서도 자꾸 떠오르는 것은 영화 <밀양>의 한 대목이다.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이웃 남자를 용서하기위해 교도소에 찾아간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당신에게 용서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이미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하였기에 그분께 용서를 받았으니까요.”  

  

이 시나리오의 원작인 이청준의 중편소설 ‘벌레이야기’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누가 나보다 먼저 그를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그를 다시 용서합니까.” 

 

 

그날 대전으로 내려가기 전에 의정부교구의 한 시골본당에서 피정 중 강의가 있었다. 연일 맑은 가을 날씨 때문에 주말의 도로는 그야말로 주차장이었다. 법대로 갈 수만은 없다고 여겨져서 갓길을 애용(?)하다가 때로 반대편 차선까지 넘나들면서 죽을힘을 다해 갔지만 15분이나 늦었다.

“날씨가 좋으니 모두 놀러 가느라고 도로가 막혀 하마터면 도착을 못할 뻔 했어요. 그런데 규칙과 법을 어기고 갓길로 위험하게 달려와서 그나마 15분밖에 안 늦었으니 저를 용서해 주셔요. 하마터면 못 만날 뻔한 여러분을 만나게 되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데 누구에게 먼저 감사를 드려야할까요?”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된다고 말했다.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된다구요? 그런데 제가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하느님께서 제게 해 주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저를 도와주실 거라면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해 주신다거나, 나왔더라도 도로가 막히지 않게 해 주셨어야 했는데 전혀 그런 도움을 안 주시더라구요. 그러기에 제가 먼저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은 제가 아무렇게나 운전을 하고 오는 동안 저를 이해해주고 용서해준 도로의 모든 운전자들이구요. 또 이렇게 불평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려주신 여러분들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안에 하느님께서 스며 계시기에 그렇게 함께 해 주시는 그분께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 채, 무턱대고 모든 일을 하느님께만 다 감사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우선적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대상은 바로 사람인 여러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로사리오성월이어서인지 전철 안이나 시내버스에서 묵주를 손에 쥔 사람을 평소보다 더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 안에 담긴 마음이 궁금해 내 시선은 오히려 바라보는 쪽에 자주 머문다. 연세가 지긋한 아저씨가 열심히 묵주알을 굴리는 아주머니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가가 물었다.

“그게 뭔가요? 염주랑은 다른 것 같은데. 그걸로 무슨 기도를 하는 거지요?”

이런 내용으로 물었다. 술을 드신 것도 아니었고 말씨도 부드럽고 온화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 방해를 받은 것 같은 표정을 한 아주머니는 전철이 서자 도망치듯 바로 내려버렸다. 황당한 표정으로 어색하고 무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아저씨를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내가 다가가 설명을 드렸다.

 

“염주하고 비슷하게 생겼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기도할 때 사용하는 묵주예요. 자신들이 공경하는 성모님께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구요. 그 부탁을 반복적으로 여러 번 하기위해 묵주 알을 돌리는 거예요.”

 

잘 알겠다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아저씨의 순한 눈빛 속에, 기도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의 눈망울이 들어있었다.

 

“나에게로 오는 이 어린이들을 그대로 두십시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마태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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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위원이며, 가톨릭뉴스<지금여기>의 편집위원이다.

이슬처럼」- 권오순시/김정식곡/노래 이슬 어린이성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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