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remo delle Carceri

 


식별을 위해 적막한 동굴로

카르체리(Carceri) 수도원은 성 프란치스코 동굴 주위에 생겨났다. ‘카르체리’란 적막한 장소를 의미하는데, 이 명칭은 그 당시 동굴에 으스스한 독방이 있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1205-1206년 사이에 동굴에 머물기 위해 이 산을 왕래하기 시작하였다. 성인은 이곳을 방문할 때 보물을 찾았다고 말하면서 친한 친구 한 명을 동반하였다. 그 친구가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프란치스코 성인은 주님의 뜻을 식별하려는 열정을 불태우며 무시무시한 동굴에 들어갔다. 성인은 그 안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울면서 “당신은 성스러우시고 주님이며 오직 하느님만이 위대한 일을 하시나이다. 당신은 최고의 선이며 살아계신 진정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은 사랑이시며 자비이시며 나의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이십니다.” 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기도하였다.

 

수도원 전경



성 마리아 동굴

프란치스코 성인은 동굴에 들어가지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왔다. 그 후에 기도의 응답으로 베르나르도(Bernardo), 피에트로 카타네오(Pietro Cattaneo), 에지디오(Egidio) 수사들이 입회하였다. 그들은 프란치스코 성인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녔고 성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닮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주위에는 공동 기도를 위한 ‘성 마리아 동굴’이라고 부르는 좀 더 큰 동굴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포르치운콜라’처럼 적막한 이곳을 1215년에 수바시오 산의 베네딕도 수사들로부터 기증받았다.

 

프란치스코 동상


관상이냐 활동이냐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역사 중에 ‘봉쇄 수도원(Eremo)'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216년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에 머물렀던 세라피코(Serafico) 신부는 매일매일 불어나는 수사들을 보면서 명상하는 삶과 활동하는 삶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그 당시 이곳 봉쇄 수도원에 머물고 있었던 글라라(Chiara) 성녀와 실베스크로(Silvestro) 수사에게 조언을 청했다. 세라피코 신부는 명상이냐 활동이냐, 이 두 길 중에서 어느 길을 가야하는 지 하느님께 물어봐달라고 마쎄오(Masseo) 수사를 그들에게 보냈다.

며칠 후에 마쎄오 수사가 글라라 성녀와 실베스트로 수사 각자로부터 동일한 답을 들고 프란치스코 수사에게 돌아와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너 자신뿐 아니라 형제들을 위해서도 걱정해야 한다.” 라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수사들이 세상에 나가서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헌신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던 것이다.

 


활동을 위한 기도와 명상

프란치스코 성인은 기쁘게 주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파견한 수사들에게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서 먼저 기도와 명상으로 무장하고, 선포한 진리를 삶으로 증언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권고하였다. 

 


거의 200년 동안 적막을 선호하는 수사들은 기도와 성가로 이곳을 가득 채우며 이 동굴들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속죄와 통회를 통해 이 세상과 자신들의 죄를 주님께서 용서해주시도록 간청하였다.

수도원 야외 제대


회칙준수 운동
 

“회칙 준수 (Osservanza)" 운동의 창시자인 파올루치오 트린치(Paoluccio Trinci) 수사는 1378년부터 자신과 이 운동을 위해 카르체리 봉쇄 수도원을 얻었고, 이곳 산을 빙 둘러 8개의 좁고 낮은 방으로 된 작은 숙소로 만들었다. 그는 적막, 가난, 명상하는 삶을 열망하는 덕망 있는 수사들을 이곳에 거주하도록 초대하였다.

수도원 내부 & 수도원 경당

시에나의 베르나르디노 (Bernardino) 성인도 카르체리 수도원을 매우 아꼈다. 이 수도원의 가장 오래 된 부분이 베르나르디노 성인께 봉헌되었다. 성 베드나르디노는 회칙 준수 운동의 첫 번째 의장이 되었다. 성인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머물렀던 모든 수도원에 애착을 느꼈고 그곳들을 보수하여 진정한 영성적인 수사들의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최금자 글 김용길 사진 2008.03.10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