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름 그륀 신부, 베네딕트 성인이 우리시대에 주는 답변 강연해..

안셀름 그륀 신부가 강연을 통해 오늘 날 우리시대를 위해 베네딕트 성인이 던지는 대답이 무엇인지 찾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강연은 지난 9월 21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성당에서 관심있는 평신도 수도자들이 공간을 가득 채운 가운데 이뤄졌다.

강연 시작 전, 가야금과 오카리나 연주를 통해  분위기를 차분하고 평화스럽게 만들었고, 이어 안셀름 그륀 신부는 베네딕트 성인의 영성을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영성이요, 땅의 영성'이라고 정의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륀 신부는 '겸손'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리스도인은 겸손한 자

겸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실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해주는 용기이며, 겸손을 통해 하느님의 빛이 내 영혼 구석구석에 들어오면 우리는 양쪽 발로 땅을 딛고 설 수 있게 된다. 수도자들처럼 독실한 영성생활자들은 흔히 제 속의 그늘진 면이나 그림자들을 억압할 위험이 항상 있는데, 그런 분노와 성욕 등은 억압하면 더욱 딱딱해지고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베네딕트 성인은 특별히 '강생'의 중요성을 전하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는지, 이를테면 먹고 자고 씻고 일하는 데서 영성이 드러난다.

베네딕도회의 작업이나 수도원 건축 등에서 하느님의 영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볼 수 있으며, 우리들의 간단한 동작이나 습관적인 움직임에서도 하느님의 영이 드러난다. 따라서 전례 등 의식(儀式)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마음을 치유받을 수도 있다. 의식 가운데 거룩한 시간이 그 공간 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의식을 통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스 철학에선 "거룩한 것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우리가 인생의 뿌리와 만나게 해주고, 이런 의식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거행하면서, 이처럼 같은 전례를 행했던 우리 부모와 조상들의 힘에 접속됨으로써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때문에 우울감 같은 것이 치유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서 두 손을 올리는데, 그 때에 돌아가신 분들이 우리를 보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하늘과 땅, 산자와 죽은 이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친교를 갈망한다

한편 우리시대는 "함께 웃고 사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형제들의 공동체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난다고 안셀름 그륀 신부는 말한다.

보통 공동체가 시작될 때는 이상을 세우지만, '베드로사제단'같은 보수적인 신부가 영적 지도를 맡으면, 그런 공동체는 집단 구성원들이 모두 반대하는 표적이 있을 때만 잘 뭉쳐지므로 끝없이 '공동의 적'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는 공동의 적 뒤에 숨지 않고 각자가 마음을 열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그리스인과 유다인, 여자와 남자/자유인과 노예가 함게 살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증거가 되었다.  즉, '끼리끼리가 아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더불어 살 수 있어야 진정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감정에 의지하면 공동체를 건설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라는 더 큰 목표를 따르는 구조를 가져야 하는데, 아무도 그리스도보다 낫게 여기지 말라는 베네딕트 성인의 충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베네딕트'라는 말은 '축복받은 사람이란 뜻이며, 모든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이며, 남에게도 축복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라고 주문했다. 우리는 함께 예배 드리면서, 우리 너머에 우리를 초월하는 그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 때 자신의 생각이나 존재에 대한 절대주의에서 벗어나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찾는 자

수도자들의 일차적 관심은 하느님께 자기 중심을 두는 것인데, 사람들이 우리들의 삶을 보고 하느님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도자뿐 아니라 우리시대의 많은 이들은 하느님을 체험하고자 갈망한다. 수도자들은 이런 갈망에 대답해야 한다.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인도하고 안내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문제는 동시에 사람의 문제이다. 하느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곧 사람에 대해 묻는 것이다. 각 사람들 속에 자리잡은 원형이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 원형이 병들면 그 사람도 병 든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 옳게 말한다는 것은 사람에 대해 옳게 말하는 것이 된다.

베네딕트 성인은 정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의 기준을 다음 세 가지로 말한다. 

하느님의 일에 대한 열성, 공동체 생활을 제대로 하는지, 어려운 일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다. 이는 인간적으로 건전한 정서를 지녔는지, 관계 맺는 능력이 있는지, 성과를 내고 있는지 하는 문제와 상관이 있다. 하느님을 찾는 자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데, 경건한 말을 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감정을 다스리고, 이웃과 잘 지내고, 일을 제대로 해내는지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낙관주의자

베네딕트 성인이 살던 시대는 민족대이동이 일어나던 혼란하고 불안한 시대였다. 그러나 성인은 그 상황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지 않고 긍정적인 공동체를 건설했다. 무너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대안문화/대조사회를 작게 시작했는데, 그게 온 유럽을 변화시켰다. 그래서 바오로 6세 교황은 베네딕트 성인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우리시대 역시 세계화의 시대이며, 불안을 일으키는 시대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무능력함을 느끼고 좌절하며, 세상은 몇몇 재벌과 은행, 권력이 장악하고 있다고 여기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네딕트 성인처럼 대안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 그런 공동체가 누룩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베네딕트 성인처럼 불안한 시대를 낙관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인은 광야에 수도원을 짓지 않고 산 위에 지었다. 많은 이들이 보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우린 지금 상황에서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미디어나 인터넷은 무척 중요하다.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도 분도 미디어 활동을 하지만, 이것은 우리 자신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기쁜 소식의 원천을 세상에 전하기 위함이다. 

예전에 은수자들은 악마와 투쟁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서 싸웠다. 가장 어두운 곳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 조금이라도 세상이 환해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우리도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해서 세상이 밝아지도록 해야 한다. 정서적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일을 막아야 한다. 장상 한 사람이 정서적으로 불안하면 온 공동체가 불안해진다. 환경오염이다. 분위기를 밝고 맑고 인간적이 되도록 하는데 이바지했으면 좋겠다.

기도하며 일하라

우리시대에 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해야 한다. 최근에 금융위기가 온 것도 한계를 모르는 탐욕 때문이다. <당가규칙서>에서 베네딕트 성인은 일의 목적이 '수입'이 아니라 '인간'임을 강조한다. 줄 게 있어야 남을 돕는다고 하지만, 형제에게 줄 것이 없으면 좋은 말을 주라고 권한다.  

많은 기업이나 공동체에서 차가운 말을 하고, 무시하며 말로 상처를 준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불혀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불혀'란 성령이 '따뜻한 언어'라는 뜻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올랐다"고 전한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말씀이 영의 집"이라고 했다. 우리는 말로 집을 짓는다. 차가운 집을 만들지 말고 편안하고 포근한 집을 만드는 게 우리 시대의 과제다.

그래서 베네딕트 성인은 "아무도 상심하지 않는 집을 지으라"고 했다. 수도원에서 사용하는 말은 바깥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일을 할 때는,  내가 만든 물건이 내 자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하며 귀하게 대하고 겸손하게 일하며, 현대사회의 광고처럼 남을 속이지 말고, 탐욕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만이 영광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 삶에 성공하는 것

참 삶에 성공하려면 시편 34장처럼 "네 혀는 악을, 네 입술은 거짓된 말을 조심하여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찾고 또 추구하여라." 베네딕트 성인의 모토는 '평화'였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 속에 평화를 지녀야 한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고유한 삶을 배워야 하는데, 하느님은 각 사람마다 맞아떨어지는 암호와 비밀번호를 주셨다.

우리 생명은 하느님이 나에게만 맡겨놓은 사명을 행하고, 그 소리를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선 좁은 길로 가라고 말한다. 넓은 길은 누구나 가는 길이지만, 실상 좁은 자기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은 좁지만, 하느님의 사명 안에 있기 때문에 넓은 마음으로 인도되며, 공평하고 자유로움 속에서 낙관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과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세상에 하느님의 축복으로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안셀름 그륀 신부는 손을 가슴에 얹고 축복을 확인하는 의식을 참석자들과 함께 연출했다.  

 

 

 

 

 

 두 손을 가슴에 교차시켜 모으는 것은 마음 속에 대립된 것을 모두 긍정한다는 뜻이고, 예수님처럼 신자가 위에서 모든 이를 내 안으로 끌어안겠다는 뜻이고, 내 자신을 감싸안는 것이며, 내 안에 있는 장점과 약점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고, "주님, 이 집에 들어오는 치유의 천사들이 내 안에 머물게 하시고, 우리를 평화로이 보호해 주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의 축복이 우리와 우리 주변에 머물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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