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좋아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술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고민도 털어놓으며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술자리를 좋아한다. 사실 많은 애주가들은 술도 술이지만 이런 인간적인 분위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술잔을 맞대고 서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 혼자만의 문제일 것 같은 중압감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혹은 어떤 경우에는 해결방법을 그 속에서 찾아내기도 한다. 말 그대로 기쁜 일을 나누어 배가 되게 하고 슬픈 일을 나누어 절반이 되게 만드는 거다. 정말 고마운 술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그 좋아하는 술을 끊을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술이 가져다주는 병폐가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훨씬 웃돌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다닐 때와 직장생활을 하던 20대, 이른 바 술이 ‘셌다’. 그러나 직장을 그만 두고 전업주부로서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살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술을 멀리하게 되었고, 친구들을 만날 때나 남편과 함께 가볍게 한두 잔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성당에 나오기 전에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던 나는, 성당에 나오면서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본당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부터 사람들과 교류도 많아지고 모임도 잦아지면서 그에 따른 뒷풀이도 빠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교회내 거의 모든 단체가 모임을 마치고 뒷풀이로 당연하게 술자리를 즐기고 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단체 뒷풀이 뿐만 아니라 신심행위 중 하나인 레지오마리오 주회 후에도 신자들은 당연한 코스로 술집으로 가서 이른바 ‘2차 주회’를 한다. 성경강의를 듣고도 그렇고 전례행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렇고 한밤중에 무덤조배를 하고 나서도 그 핑계 삼아 또 술을 마신다. 모이면 술 마실 기회만 본다. 주와 종이 서로 뒤바뀌었다 할 수 있겠다.

술자리가 길어질수록 귀가시각은 머리에서 사라지고 끝을 보고야 마는 상황으로 내달린다. 정작 단체 모임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술자리가 마련되면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본당과 단체, 교회에 대해 성토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마셔댄다. 어쩌면 이런 습관들이 고질적인 술 문화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1차, 2차, 3차 등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마신다. 이 정도면 사람이 술을 마신다기보다 술이 사람을 마시는 꼴이다. 이런 모습이 단체모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성당의 말초적인 혈관조직이라 할 수 있는 구역모임에서도 이런 현상은 여지없이 나타난다. 형제모임 혹은 구역모임을 하고나면 당연하게 술상이 이어지고 그 다음에는 화투를 치거나 당구장으로 ‘헤쳐모여’ 한다. 결국, 도가 지나친 술 문화로 인해 모임의 참뜻이나 신심행위는 점차 퇴색되어 가기도 한다. 물론 개인생활과 가정생활에 미치는 영향이야 두말 하면 잔소리아니겠는가. 평신도 뿐만 아니라 과도한 음주습관을 가진 성직자들도 많다. 이렇게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술문화에 혐오를 느끼는 신자들은 당연히 교회에 부정적이게 되고, 심한 경우 교회에 등을 돌리기도 한다.

교회의 현황을 두고 고민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본당의 여러 행사를 앞두고 머리를 싸매고 시간을 쪼개어 봉사하는 모습 또한 참 아름답다. 그런데 과도한 술 때문에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이 헛되게 산산조각이 나고, 예기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면,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과감하게 이것을 벗어던질 용기를 내야할 일이다.

시대가, 사회가 술을 권한다. 특히 지금은 정말 목마르다. 하지만 술에 취해 시대를 읽어내는 지혜가 흐려진다면, 우리가 술을 마시며 하는 모든 고민이 채 타지도 못한 채 사그러들지 모르니, 술이 나를 술술 마셔 몸도 영혼도 가져가게 하지 말 일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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