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사회,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택 옮김 / 새물결, 1997

어떤 현실적인 원도 그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가 동일할 수 없다면 완벽한 원, 즉 원의 이데아는 관념 속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소위 '이데아'론이다. 감각으로 파악되는 경험적 현실이 이성으로 파악되는 관념의 세계보다 열등하다는 플라톤의 논리의 연장선에서는, 육체는 늘 이성에 뒤쳐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머리는 몸통 위에 얹혀, 몸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해서 육체에 대한 이성의 우월을 정당화하고 싶어 한다. 만약 사고를 관장하는 인간의 두뇌가 허리 아래 부분, 다시 말해서 생식과 배설을 담당하는 기관 옆에 붙어 있었다면 이성이 오늘처럼 여전히 패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베이컨은 자연을 아는 것, 곧 과학이 자연을 지배하는 힘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인간의 이성은 과학의 힘을 빌려 더 이상 두려움을 모른다. 도시의 어디에도 암흑은 없다. 고성능의 살상무기를 휴대한 인간에게 더 이상의 적수는 없다. 호환과 마마는 더 이상 인간을 괴롭히지 못한다. 맹수들은 철창 속에 있고 벼락은 피뢰침을 타고 땅 속으로 방전된다. 게놈지도를 이미 완성한 생명공학 기술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나가는 정보 기술의 행보는 자못 눈부신 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소년 코난>이나 <터미네이터>가 말하는 지구의 미래는 어둡다. 가을 들판의 폐허를 그린 시인 정현종의 <들판이 적막하다>, 산모가 굴뚝과 간통해 무뇌아를 낳았다고 노래한 최승호의 <공장지대>,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고기를 싸고 있다고 표현한 신경림의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는 암울한 어조로 오늘을 말한다. 이쯤 되면 기술주의자들이 예술가들을 곱게 봐줄 리 없다. 툭하면 비관론으로 기술의 딴죽을 걸기가 일쑤요, 허황된 불안을 근거 없이 유포한다는 비난이 예술가에 덧씌워지기도 한다. 현실을 망각한 낭만주의라는 이름으로 예술가들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한다. 시가 독자의 감정을 흥분시켜 예지력을 해쳐 진리의 길을 막는다고 보았던 플라톤은 진리가 이념이 되고 정의가 실현되는 이데아(idea)의 세계, 즉 공화국에서는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예술가에 대한 오늘날의 기술주의자들의 견해와 플라톤의 생각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예술가에 대한 기술주의자들의 불만을 요약하면 이렇다. '근거도 없이 투덜대는 불평꾼들.'

그러나 첨단의 보안장치에 엄청난 자본을 투여한다 할지라도 기술 속에 있는 인간은 여전히 불안하다. 첨단의 장비로 세팅된 초고층 인텔리젠트 건물에 정전이라도 된다면, 지구촌의 구석구석을 잇는 네트워크 시스템에 오류라도 발생한다면, 고속철도의 제동장치에 결함이라도 생긴다면, 하다못해 자료를 입력 해놓은 하드디스크에 바이러스라도 침투한다면…… . 기술주의자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강변할지 몰라도 하늘 아래 어디 완벽한 것이 있겠는가. 기술주의자들은 말할지 모른다. 불안이 또 다른 기술을 낳는다고. 좀더 강화된 안전장치와 보안체계가 기술에 대한 인간의 불안을 해소할 것이라고. 그러나 모든 빗장은 풀리기 마련이다. 아무리 단단한 자물쇠 앞에서도 인간은 불안한 법이다. 위험은 늘 소리 없이 도둑처럼 오지 않던가. 와서는 말하지 않던가. 너희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서 뒤늦게 한탄하고 통곡해 봐야, 헛일이다. 기술이 위용을 자랑하는 곳에서 위험은 구렁이처럼 똬리를 튼다. 세치 혀와 문학적 수사로 기술을 얕보지 말라고, 기술주의자들은 불만을 터뜨리리라. 왜 얕보겠는가. 인터넷이 욕설과 비방의 장으로 변한 감이 있긴 하지만 토론을 활성화시킨 공로를 왜 무시하겠는가. 가사기술이 여성으로 하여금 과중한 가사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다는 논리도 오십 퍼센트는 수긍할 만한 일이다. 의학 기술이 인류의 고통을 경감시켰다는 논리에도 반 이상은 수긍할 수밖에 없다.

▲미래소년 코난에 나타나는 미래는 암울하다



기술로 해서 인간은 편리를 얻었지만 그 편리의 실제적 내용에 대해서는 좀 따져봐야 할 일이다. 대체 어떤 편리함인가. 리모컨으로 TV를 켜고 끌 수 있는 편리? 인스턴트식품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는 편리? 섹스머신을 통해 생리적 욕구를 간편하게 해소할 수 있는 편리? 각진 얼굴을 좀더 원만하게 성형할 수 있는 편리? 기술로 해서 현대인은 편리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정작 잃어버리는 것은 없을까? 하긴 무엇에나 그늘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누가 그늘을 말할 것인가.

근본주의자들은 말할 것이다. 다 버리자. 땅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씨 뿌리고, 싹 틔우고, 꽃 피우고, 수확하고 계절처럼 순환하자. 소박하게 먹고 입고 마시자.

버리는 자들은 아름답다. 명분이나 대의 따질 것 없이 '차떼기'로 챙기는 자들보다야 백만 번 아름답다. 그러나 과연 근본주의자들의 소망대로 이 문명이 제 욕망을 순순히 비워낼지는 의문이다. 움직이는 물체들은 계속 움직이려 한다는 뉴턴의 운동방정식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를 이끌어 가는 거대한 기계들이 작동을 멈출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모든 시스템은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만 반성의 시간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어떻게'에 대해서는 묻지만 '왜'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위험사회』의 저자 울리히 벡은 우리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위험사회의 원인이 된 과학 기술이 역설적이지만 또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단 개인, 사회, 나아가 국가, 그리고 전 세계가 과학 기술에 대해 성찰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난 뒤에야 그 해결책이 가능하다고 예측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일상은 성찰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성찰은 최소한 멈칫거리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일로부터의 '거리'를 필요로 한다. 세계의 몸이 썩든 말든 생산을 위해 촌분을 아기지 말고 머리를 굴리라는 것이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현실이다. 업적이 신통치 않으면 해고를 감수해야 한다.

시인 정현종은 노래한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견딜 수 없네〉 전문

대체 이 번지르르한 시대에 무엇이 아파 견딜 수 없다는 것인지. 시인들의 엄살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변화도 아픔도 다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보이다 안 보이는 것들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기술이 불안을 낳고, 다시 그 불안이 기술을 낳는 이 기술의 무한확장 시대에 '돈과 권력과 기계가 나를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는 정현종 시인의 외침은 비장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문명의 웅자 앞에서 초라할 수밖에 없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어림 턱도 없는 소리다. 그러나 광고와 프로파간다의 시대에, 이런 초라한 소리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밤의 식료품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 최승호,<북어> 전문

자갈처럼 딱딱한 혀를 가진 사람들의 시대에 시인의 엄살이란 무엇인가. 결국 당신이나 나나 싱싱한 지느러미를 잃어버린 북어는 아니겠냐는 울분이요 한탄이다. 시인이 싱그러운 지느러미와 그것이 꿈틀거리는 대양을 꿈꾸지 않았다면 북어의 딱딱함을 굳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자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시인들은 민감한 센서의 소유자가 아닌가. 왜 고통이 닥쳐서야만 아파한단 말인가. 통증이 오기 전에 미리 아파하는 것이 시인의 엄살이다. 그들은 남들보다 먼저 아파함으로써 세상이 병들었음을 말한다.

病을 생각하는 것은
病에 매어달리는 것은
필경 내가 아직 건강(健康)한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巨大)한 비애(悲哀)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거대(巨大)한 여유(餘裕)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 김수영, <파리와 더불어> 中에서


병은 세상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빨간불이다. 고통은 정상으로의 복귀를 바라는 병든 몸의 신호다. 누구가가 몸의 부름에 답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이 병들었다면 누군가가 아파야 정상이다. 문명은 당당한 낯빛으로 자신의 건재를 자랑하지만, 비애와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땅에서 '거대한 비애'와 '거대한 여유'를 가진 자들은 아프다. 시인의 엄살이 없는 곳에 문명의 불안은 없다. 그곳엔 의기양양한 문명만이 우뚝할 뿐이다.

시가 씌어지고 또 팔리는 시대가 왔으면 하지만 눈과 귀를 빼앗는 테크놀로지의 화려함 앞에서 이런 희망은 부질없다.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라는, 오랑캐 땅에서 부르는 왕소군의 노래가 예사스럽지 않게 들린다. 겉멋이 들지 않은 시인, 온몸으로 시를 쓰는 시인, 세상보다 먼저 병들어 세상의 병을 예언하는 시인, 그의 엄살이 그리운 시대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국어과 교사)
현재 배문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출판인회의 '이 달의 책' 선정위원, 청소년출판협의회 고문 등 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도서정보 포털사이트인 ' 리더스가이드(www.readersguide.co.kr)'에서 연재한 북리뷰를 모아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소나무)를 냈으며 『한국의 교양을 읽는다-과학편』(휴머니스트)를 저술했다. 한국출판인회의 '이 달의 책' 선정위원, 청소년출판협의외 고문 등 책과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