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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신부, 허벨벨 신부, 헐레벌떡 신부, 안녕 잘 가세요!9월 1일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허창수 신부 장례미사 봉헌

   
이날 수도원장인 이형우 아빠스의 주례로 80여명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수사와 사제들이 공동집전하였다.

허창수 신부의 장례미사가 지난 9월 1일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성당에서 봉헌되었다. 이날 수도원장인 이형우 아빠스의 주례로 80여명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수사와 사제들이 공동집전하였다.

허창수 신부(독, 본명; 헤르베르트 보타와- 1941년 체코출생)는 KNCC대구인권위가 1995년 인권상을 만들고 제일 먼저 만장일치로 인권상을 주었으며, 대구지역에서 40년 가까이 인권운동을 해왔다. 성 베네딕도수도원 소속 사제로서 유신정권이 시작되던 1972년에 한국에 와서 한국 엠네스티 설립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대구대교구 대명성당 안에 있는 대구가톨릭신학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대명성당을 민주화운동의 해방구로 만들기도 했다.

또한 1985년부터 현재까지 구미 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소장을 맡아 노동자의 인권에 큰 공헌을 했으며, 최근 1996년엔 구미에 외국인노동자상담소를 설립해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보호지원 활동에 애정을 기울였다. 

그러던 허창수 신부가 지난 8월 26일 향년 68세로 연수차 방문했던 독일 뮌헨 부근 성 오틸리엔수도원에 서 심장마비로 선종했다. 그는 20년 가까이 파킨슨병으로 고생했으나, 이날 추도사를 올린 남영진 엠네스티 전 한국지부장에 다르면 "어절 수 없잖아요. 괜찮아요. 나브지 않아요"라고 불평 한 마디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한국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던 허창수 신부였지만 오틸리엔수도원에 묻혔으며, 이날 왜관 수도원에서는 허 신부의 영정만 모시고 장례미사를 드렸다.

   
▲허 신부의 삶은 가난한 이들을 선택했던 예수의 십자가 아래 봉헌된 삶이었다.

   

   

   
▲성 베네딕도수도원 구 성당

   
▲미사에 참석해 허 신부를 애도하는 신자들과 수도자들.

이날 한국인권행동의 이주영 활동가에 의해 대독된 오완호 선생의 추모시를 옮긴다.  

허창수 신부를 보내며.

- 오완호 -

허신부!
헤르베르트 신부!
보타바신부!
허벨벨신부!
헐레벌떡신부!
에리히 보타바신부!

당신은 사제였습니다.
경건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수도사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고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갇힌 자를 찾아다니며 위로한
진정 당신은 하느님의 종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땅에 인권이란 나무를 심었습니다.
유신에 항의하여 턱수염을 기르고
사형, 고문, 양심수의 종식을 위해 항의편지를 쓰고
모임, 세미나, 교육을 조직하고
총칼을 피해 수배된 청년을 숨겨주시며
보안사에 연행되었을 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온갖 지탄 속에서도 민주화운동을 위해
대명성당 신학원을 내어주며
인권의 참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당신은 장애인이었습니다.
20년 넘는 세월을 파킨슨씨 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떨리는 손, 가늘어진 다리에도
한 번도 좌절하지 않는
"어쩔 수 없어요"
"괜찮아요"라는 말로
도리어 우리를 격려하였습니다.

당신은 웃음을 유독 좋아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의 놀이도 좋아했고
기르던 콜리도 사랑하며
장난치기를 즐겨하며
짓궂게 놀리기도 즐겨하며
등산, 수영, 스키를 좋아하며
웃음과 함께 항상 있었습니다.

당신의 그 웃음, 그 유머가
너무 좋았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술꾼이었습니다.
다른 맥주들은 말 오줌이라 평하며
유독 크라운 맥주를 좋아하고
항상 "저 목말라요"라며 맥주를 마시던
책상아래에 술병을 숨겨두고
지하실에서 양파주, 포도주, 무우주, 자두주 등을 제조하며
즐거워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말년에 허 신부가 관심을 기울이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당신은 강했습니다.
외로움, 고독이란 단어는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교통사고로 코뼈가 내려앉았을 때도
이빨이 빠졌을 때도 당신은 웃었습니다.
침상에서 떨어져 피가 헝건했음에도
머리의 땜통을 보여주며 당신은 웃었습니다.
당신이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요"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인권, 윤리, 노동자, 한국인,
맥주, 스키, 형님, 구미, 대명동신학원, 앰네스티
당신이 너무나 사랑한 것입니다.

허신부!
헤르베르트 신부!
보타바신부!
허벨벨신부!
헐레벌떡신부!
에리히 보타바신부!

안녕, 잘 가세요!

하느님!
허신부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세요.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새로지은 성당 지붕에 올라앉은 닭이 예언자를 부르는 듯 하다.

 

“사형제 존치, 비겁한 정부 국회”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독일신부 허창수


2006/3/31 김춘효 기자 monica@ngotimes.net 가 <시민의 신문>에 썼던 기사를 덧붙입니다. -편집자

   
▲허창수 신부
한국의 인권운동과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외국 성직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신의 뜻을 성소에서만 찾지 않는다. 창조주의 사랑은 성소 밖에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부임한 곳에서 사랑을 실천한다.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말이다.

허창수(본명: 헤르베르트 에릭 보타와(Herbert Erich Wottawah·65) 신부는 한국 인권신장을 위해 34년간 부단히 노력했다. 허 신부는 한국 노동운동과 인권 운동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독재시절 부당하게 억압받으며 살았던 한국 노동자들과 한국 인권운동가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벽안의 이방인이 한국의 인권 신장을 위해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계속한 것이다. 본지는 전 국제앰네스티 한국 지부장을 지냈던 허창수 신부를 만나 한국 인권운동을 한 그의 경험과 사형제도에 관한 의견을 들어봤다. 

2006년 3월 25일 대구시 대명동.

대구 카톨릭 신학원 앞마당에 개나리와 벚꽃이 한창이다. 김명식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간사와 기자는 허창수 신부를 기다리며 춘화(春花)들을 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민의 신문에서 오셨죠”

턱 수염을 한 잠바 차람의 벽안의 외국인이 한국말을 천천히 한다. 김 간사는 신부님을 만나기 전에 기자에게 허 신부님의 지병에 대해 일러줬다. 그가 오래전부터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서서히 기억력과 근력이 약화되는 상실의 병에.

“신부님 잘 생기셨내요”

기자가 그에게 처음 건넨 말이다.

“당근이지. ㅋㅋㅋ”

허신부의 대답이다. 이어서 그는 기자에게 계속 말을 했다.

“내가 파킨슨병이 걸려서 말을 많이 못해요. 요즈음 힘이 많이 드네요. 매일 2시간마다 약을 먹고 있어요. 인터뷰를 하기 전에 미리 양해 말씀드립니다.”

기자가 “신부님, 불편하시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을 했다.

허 신부는 “아닙니다. 지금 약을 먹었으니 2시간 정도는 괜찮습니다. 근력이 굳는 병이니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말하는 것도 운동입니다”라며 웃는다.

기자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니 그는 또 웃는다. 소년의 웃음이다.

갑자기 봄의 불청객 황사가 신학원 앞마당을 덮쳤다. 우리는 서둘러 봄꽃을 창밖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조용한 장소로 옮겼다.


“한국에서 행복했다”

허창수 신부는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독일인 신부이다.
독 일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한국 이름을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왜 이상해요. 내 이름이 헤르베르트잖아요. 발음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말한다. “내 국적이 한국이었다면 나는 지금 한국에 없어요”라고 말한다. 외국인 사제였기 때문에 한국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을 함께 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사제가 되기까지 마음의 갈등을 많이 겪었다”고 말한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형조차도 만류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성직자의 길이 자신의 길처럼 받아 들여졌다고 한다.

그 뒤 그는 한번도 사제의 길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사제의 길에 들어선지 40년. 그중 35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행복한 삶이었다. 그는 사제였기 때문에 한국 민중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는 “감사한 일”이라고 말한다.

허 신부는 세계에서 한국만큼 역동적으로 민주주의를 경험 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고 믿는다. 그는 “독일에서 살았다면 상당히 지루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고 말한다. 허 신부는 안정적인 삶보다는 어려워도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의 좌우명도 “포기하지 마라”다. 허 신부는 자신의 좌우명이 틀리지 않아서 너무 좋다고 말한다. 살아서 사람들과 함께 보다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즐거움은 그 어느 세상 가치와 비길 바가 아니라고 믿는다.

수도회 본원에서 한국으로 갈 것을 요청 했을 때 흔쾌히 응했다. 한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한국행을 결정하는데 3분도 걸리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지난 72년 한국에 왔다. 그가 입국한 다음날 유신헌법이 선포됐다. 허 신부는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으려고 헌법을 고치고, 그것을 반대하는 국민들을 무력으로 짓밟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한국 민중들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인간 의사 결정권 존중해야”

그는 그의 첫 한국 부임지는 가야산 부근에 있는 경북 성주성당이다.
이곳에서 성직자로서 삶을 사는 한편 어려움에 처한 노동운동가와 인권운동가를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돼지도 키우고, 벽돌도 구워 팔았다.

그는 90년 초까지 정권으로부터 ‘요주의인물’로 찍혔다. 구미에서 활동 할 당시에는 노동자 카톨릭 근로자 센터도 만들었다. 사람을 하나의 상품으로만 인식하는 천민자본주의에 맞섰다. 동반자적 노사관계 정립을 위해 10여권의 노동관련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성당에 찾아온 양심수들을 숨겨줬다. 그가 원장으로 있던 대구 카톨릭 신학원은 수배자들과 이를 찾는 경찰들, 집회로 인해 조용 할 날이 없었다.

허 신부는 민주주의는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무리 반대되는 의견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는 인간은 누구나 존엄성을 갖고 있고 자아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는 그래서 사형제를 반대한다. 인간을 쓰레기 취급하기 때문이다.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삶에 대한 기회를 줘야한다고 믿는다. 사람을 죽인다고해서 사람이 착하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를 설립한 주요 인물이다. 지난 91년부터 10년간 한국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인혁당 관련자 세례 받고 저녁에 처형”

허 신부는 사형제의 부당성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 는 “인혁당 사건을 수감된 어떤 사람은 저녁에 세례를 받고 그 다음날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 기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허 신부는 또 파키스탄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이 오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사건을 예로 들었다. 많은 인권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이주 노동자들의 무고함이 밝혀졌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그들은 무기징역에서 무죄 석방돼 본국으로 돌아갔다.

허 신부는 사형제 폐지를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 정부와 국회가 국민 법감정이라는 이름으로 사형제 폐지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사형제 폐지를 위해 국민 대표기관들은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국민들이 왜 그들에게 위임권을 주었는지 성찰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들은 그들에게 국가와 자신들을 위해 옳은 일을 하라고 그곳에 보냈습니다. 핑계를 만들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인터뷰는 2시간 동안 진행됐다. 1시간이 넘어가자 김명식 간사가 허 신부님의 말씀을 설명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손발은 많이 떨렸고 발음 정확도가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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