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엄기호]

몇 년전인가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친구의 친구를 가로채었을 때 상대방의 반응이 어떠한가를 몰래카메라로 살펴본 것이 있었다. 설정은 멀리 해외여행을 다녀온 연인을 만나러 간 자리에 그 연인의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나간다. 연인이 여행 선물을 풀어놓는 동안에 그 제일 친한 친구가 혼자 있는 자기를 위로해주기 위해 만났다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연인에게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너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라는 분노에서부터 ‘아이야. 이건 사실이 아닐꺼야.’라는 부정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종의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너무 놀라운 얼굴로 자기 애인과 친구를 쳐다보다가 ‘그래! 할 수 없지 뭐. 잘해봐. 한 대 치고 싶지만 넘어간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시청자들의 반응은 ‘오, 쟤네들 정말 쿨cool한대!’라는 경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뒤따른 몇몇 여론조사에도 점점 더 많은 젊은 세대들이 쿨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더 뚜렷해지고 있다고 한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쿨한 것이 대세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공부고 일상이고를 다 때려치우고 실연의 아픔에 인생 자체를 자포자기하는 것만큼 한심한 일이 없다. 나의 졸작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에서도 소개하였지만 한 유명대학을 다니면서 의학전문대학원을 준비 중인 한 친구는 그저 섹스파트너만을 두고 있다. 심지어 그 파트너의 이름과 소속이 어디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단다. 목적이 사랑이 아니라 섹스이기 때문에 그것만 충족시키면 된다고 한다. 오히려 이름 등을 알게 되면 목적 이외의 마음이 생길 수도 있고 그것에 의해 공부가 방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말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이번 방학때 있었던 해외여행 중에 만난 한 친구는 어학연수를 가서 대학생들이 동거하는 문화에 대해서도 대단히 쿨하게 몇 마디를 나누었다. 나 역시도 한국처럼 동거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벗어나 청년들이 살림을 경험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친구의 이야기는 ‘사랑’이 아니라 ‘동거의 편리함’이었다. 돈도 절약될 뿐만 아니라 외국인 친구를 사귈 경우 영어가 훨씬 더 빨리 늘기 때문에 더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어학연수 기간 동안의 사랑은 그 시간동안에만 유효하기 때문에 한 쪽이 서울로 떠나는 순간 깨어지는 것은 너무 당연하며 서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즐거웠어.’ 쿨하게 헤어질 줄 알아야한다.

사랑은 뜨거운 것이 아니라 쿨cool한 것이어야 한다고..

이들은 사랑이 뜨거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유치하기만 해서는 정말 유치한 것이고 그 안에 합리성과 냉정한 거리유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다. 사랑은 뜨거운 것이 아니라 쿨cool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다. 뜨거운 사랑이 초래하는 자아의 붕괴라는 치명타를 반드시 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다. 자아가 붕괴되지 않을 딱 그 정도의 거리를 필수적으로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나의 일상을 파괴할만큼의 강력한 사랑은 그만큼 치명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런 모습은 대단히 성숙한 태도이다. 수십 번의 시행착오, 사랑과 실연의 반복 끝에서야 얻는 사랑에 대한 지혜를 일찌감치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과연 이들이 앞선 세대보다 더 합리적이고 성숙하였기 때문에 열정적 사랑의 맹목성에서 벗어난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런 ‘성숙한 태도’에서 오히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감당하지 않으려는’ 매우 심약하고 유아적인 퇴행을 만나게 된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감당하지 않으려는

왜냐하면 상처 없는 성장과 성숙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처를 통해서 세상과 사람을 배우고 그 속에서 삶을 만들어간다. 아픔을 통해 인간이 궁극적으로는 혼자라는 것도 깨닫게 되고 혼자인 그 가운데에서도 인간은 또한 서로에게 끊임없이 의지해나가는 이중적인 존재라는 것을 배운다. 인간의 운명이 가진 이 이율배반은 오로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이라고 하는 뼈아픈 상처와 경험을 통해서만 배워갈 수 있다. 인간은 상처를 통해 만신창이가 되어가면서 성숙해가는 존재이다. 이것은 책 한 권이나 영화 한 편으로 요약 발췌될 수 있는 그런 지식이 아니다. 이런 상처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등가관계란 없다

사랑은 뜨거운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눈이 먼다. 다른 아무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오직 그 사람만이 눈에 보인다. 사랑에는 등가관계란 없다. 콩깍지가 쓰인 사랑은 오로지 일방적으로 퍼주는 마음뿐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첫 선물을 사줄 때의 마음을 보라. 향수를 샀다가 혹 마음을 고백하는 사람이 향수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른 하나의 선물을 미리 더 준비해 놓는다. 등가와 교환 관계를 넘어서는 사랑. 여기에 쿨cool함이라는 것이 설 자리는 전혀 없다.

유치한 사랑, 퇴행의 즐거움

사랑은 유치한 것이다. 사랑이 주는 가장 큰 쾌감중의 하나는 퇴행의 즐거움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보라. 이보다 더 유치할 수는 없다.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서로에게 앙앙거린다. 내용은 또 어떠한가? 쓸데없는 일로 아옹다옹하고 그 오해를 푸는데 또 몇 시간을 소비하고 그러다가 또 다시 다른 오해가 쌓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티격태격의 연속이다. 아이들의 놀이가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것처럼 생산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연애는 시간과 에너지 낭비의 연속뿐이다. 여기에 냉정함이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궁극적으로 뜨겁고 유치한 사랑은 자아의 붕괴를 초래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은 없고 오로지 그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사람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나는 존재하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무의미하다면 나 또한 무의미해진다. 자아가 붕괴되고 난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은 우리 시대의 연애의 시나리오이다. 그래서 연애에 관한 모든 영화는 다 똑같은 진부한 패턴이고 실연을 당하고 나면 그 모든 뽕짝 노래들이 다 내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자아가 붕괴된 자리에서 열심히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은 ‘나’가 아니라 진부한 연애의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실연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스승이라고

실연의 상처는 이 붕괴된 자아가 고통스럽게 회복되어가는 과정이다. 실연은 문자 그대로 세상의 붕괴이다. ‘나’가 없이 ‘너’만으로 구성된 세상이 ‘너’가 ‘나’를 버림으로써 붕괴해버린 것이다. ‘너’만 있다면 ‘나’가 없어도 세상이 존재하다가 갑자기 ‘나’가 없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고통스럽게 깨달아가는 것이 실연이다. 실연의 극복이란 붕괴된 자아를 다시 홀로 세우면서 세상을 다시 만드는 일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현인들이 사랑과 실연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스승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런 사랑과 실연 이전에 이들은 경험적으로 세상이 불안전하고 불안정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사랑도 역시 불안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불안정하여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사랑을 하면서 자기를 방어하는 유일한 대책이 바로 쿨cool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나온 삶의 지혜가 아니라 불안정한 삶precarious life사회 조건 자체가 만들어낸 생존 본능이다. 이 생존전략에 성장과 성숙이란 없다.

친밀감에 대한 온갖 가지의 상품화

대신 그 자리를 자치한 것은 인간의 친밀감에 대한 온갖 가지의 상품화이다. 이전에 갑자기 눈물을 뚝뚝흘리며 절규하던 한 친구가 생각난다. ‘나는 이제 섹스는 지긋지긋해. 이젠 사랑이 하고 싶어.’ 곧 이 친구가 사랑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섹스를 구매하던 것만큼이나 그 사랑의 감촉과 느낌을 구매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편의점에서 다양한 음료수를 고르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친밀감을 구매할 수 있는 시대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장 길거리에 넘쳐나는 키스방 광고를 보라. 섹스를 구매하는 것도 아니고 키스나 포옹과 같은 것도 쪼가리 쪼가리가 나서 상품으로 팔려나가고 있다. 돈으로 사랑의 촉감까지 살 수 있는 시대에 왜 굳이 피곤하게 연애를 하고 실연의 아픔을 감수하겠는가? 왜 우리가 굳이 그러면서까지 인간의 운명을 깨달으며 성장해야하겠는가? 쿨해져라. 이것이 이 시대의 도덕적 명령이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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