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이야기] 나사렛 마리아-3

마리아 생각, 다시 시작하면서..

말문이 막혀 눈만 꿈뻑이는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닌가 보다.
간디학교의 이야기를 쓰던 곽제규 학생이 올린 독자에게 드리는 사과의 글을 읽으며 그 친구 옆에 함께 서있는 것이 마땅한 나를 본다. 불혹의 시기를 다 채워간다는 이 나이에도 내 안의 나를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다. 앞뒤 없이 여름내 벙어리가 되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멈춰 서있었다.

그리고 이제야 잘못된 밑그림을 찾아내었다. 바로 내가 써낸 지난번 글에 문제가 있었다. 나자렛의 마리아에 관한 둘째 글 마지막 부분의 흐름을 되짚어 보았다. 예수 사건의 첫 증인으로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한 교회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마리아에게 방문하였던 천사 가브리엘은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신다고 알렸다. 그 성령의 활동에 응답했던 마리아는 일생을 그 성령과 함께 대화하며 마주치는 사건들의 의미를 알아나갈 수 있었다 …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 아들을 따르던 제자들과 함께 살게 되었고, 그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아들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 마리아의 기억은 교회의 기억이 되었고 나아가 마리아 그 자신이 교회의 기억이 되었으며 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드리는 셀 수 없는 칭호들과 다양한 공경예절의 배경과 이유를 아는 것은 제대로 된 신앙의 형성을 위해서 중요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 또한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은 역사적 흐름을 따라 다양해지고 교의로 확정되었다.

바로 위의 문맥에 이어질 내용이 문제를 일으킨 부분이었다. 왜 교회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칭호까지 사용하여 공경하기에 이르게 된 것일까? 또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공경예절들과 교의들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공적인 기준이 되었는가? 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갈 참이었다.

그런데 교의에서 시작하여 마리아를 이해하겠다는 그 방식이 나의 글쓰기를 멈추게 한 것이었다. “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해를 교의에서 시작해야 하는가?”에 답을 할 수 가 없었다. 교의를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는 많은 신자들 혹은 가톨릭의 교의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의 의혹에 나 역시 어느 정도 동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나? … … 그렇다면 어디에서 마리아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어떤 이유로 그분을 공경하기 시작할 것인가?

멈추어있던 생각의 끝에서 떠오른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에게 마리아가 귀중한 것은 예수의 어머니라는 그분의 위치 때문이고, 그러기에 어머니에 대한 아들 예수의 태도를 되짚어 따라 하는 것이 그의 제자로서 마땅한 태도라는 원점으로의 회귀했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이해하는 시작은 성서에서 시작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또다시 성서에서 시작하기

공관복음에서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직접적인 관계를 알 수 있는 대목은 두 곳이다. 예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의 직업과 가족관계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일상을 넘어서는 그의 복음선포 활동을 비판하고 (마르코 6.3), 심지어 미친 짓거리로 여기기도 한다 (마르코 3:20-21). 왜냐하면 예수는 일상적이지도 않고, 이해하기 힘든 “복음선포” 활동을 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아들 예수의 태도가 전해진다.

그런데 열두 살이 된 어린 아들이거나 (루가 2.48-49), 제자와 군중들에 둘러싸여 활동중인 청년이 된 아들이거나 (마르코 3:31-35), 예수는 어머니에게 대해서 공손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정체성과 활동을 이해하지 못하는듯한 어머니에게 심한 불만을 가진듯하다. 즉, 아들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대화는 갈등하는 모자 관계를 보여준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루가 2.48-49)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마르코 6.3)

예수께서 집에 돌아오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3:20-21)

그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께 왔으나 사람들이 많아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을 만나시려고 밖에 찾으십니다." 하고 알려드렸다. 예수께서는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코 3:31-35; 마태오 12.46-50; 루가 8:19-21)

그런데 요한 복음서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됨됨이를 잘 이해한다. 그러기에 아들의 활동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주선할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을 만큼 과격한(?) 아들의 활동을 지지한 것 같고 그 죽음이 자리에까지 함께 한다. 예수가 어머니의 열성에 떠밀려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를 의심할 만큼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밀접하다. 하지만 예수는 여전히 어머니와 갈등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죽음에 이르러 어머니를 걱정하는 연민을 보여준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다.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 (요한 2.3-5)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5-27)

▲Redemptoris Mater Crocifissione SX


복음 선포활동을 둘러싼 아들과 어머니의 갈등? 혹은 연대?

세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표현은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에 관해 상반되는 이해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아들인 예수의 자기 정체성과 복음선포를 둘러싼 어머니와의 갈등관계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즉 신적 소명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관해 간섭! 하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태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네 복음서의 본문을 예수의 활동 시기와 연결해서 통시적으로 배열하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를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어린 아들의 당돌한 이야기에 놀란 어머니 마리아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루가 2, 51), 그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았고, 아들의 소명에 관해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기에 결혼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빚는 기적을 이끌어 내고, 잔치의 기쁨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아들이 땅에서 이루어내는 하늘나라를 함께 맛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들 예수의 활동범위가 넓어지면서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물의에 대해서는 마리아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군중들에 둘러싸여 있는 아들을 멀찌감치 따라다니며, 때로 아들의 필요를 살피기 위해서 면회를 신청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공인의 자리에 있는 아들은 살갑게 부모를 보살피기에는 늘 역부족이다. 예수 역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예수의 자부심은 한 차원 높여서 드러난다. 복음을 환호하고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그 많은 이들의 열망이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실현된 것을 알리는 것이다. 육친의 관계를 넘어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그 누구나 어머니요 형제인” 그 첫 사람이 바로 어머니였던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었다. 자랑스러운 어머니를 둔 아들 예수의 자부심이 배어 나오는 외침인 것이다. (마르코 3:34-35) 그 감추어진 교감을 어찌 다른 이들이 곁눈질에서라도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모두가 등을 돌려도 내 자식이 옳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아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마리아의 모습은 일상적인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자식이기 때문에 귀중하고, 그 자식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맹목적인 동조를 하기도 하고, 혼자 당하는 고통이 안쓰러워서 어디에든 쫓아간다. 모두가 등을 돌려도 내 자식이 옳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믿어주는 사람이 바로 어머니이다. 그런 어머니를 가장 믿을 만한 제자에게 부탁하고 죽어가는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보자. 어머니를 편안히 모시지 못하고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았지만, 눈을 감는 순간 어머니를 걱정하는 아들의 마지막 배려와 그 아들 앞에서 터지는 오열을 삼키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의 얄팍한 감상을 무너뜨린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나자렛의 마리아와 예수의 관계는 이처럼 어머니와 아들로 맺어져서 동반자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늘 갈등하는 그 관계는 함께 살아가는 부모자식이거나 동반자의 관계이다. 그래서 갈등은 관계의 표현이고, 일상적이며 심지어 필수적이다.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의 갈등은 신적인 존재인 그리스도 예수와 인간을 대표하는 마리아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신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나가는 구원사의 전형을 마리아와 예수의 일상적인 갈등의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뢰는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어머니인 인간을 위탁하는 예수의 결정은 여전히 진행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과 그 소식을 받아 선포할 교회의 미래를 맡기는 신뢰로 이어지는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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