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영성 따라 배우기-2 : 그리스도 중심주의]

한 영화 <어둠 속의  천사> 포스터
도로시 데이는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잭 런던과 업턴 싱클레어의 계급주의 소설에 자극받아 ‘무수한 독자들에게 그들이 직면한 불의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는 그런 책을’ 쓰려고 꿈꾸었다. 하지만 늘그막에 그녀는 전혀 다른 작가로 변모해 있었다. 그녀가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만연한 불의를, 아니 그보다 훨씬 신비스럽고 놀라운 사랑의 깊이를 돌이켜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바라보는 도로시의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그 관점의 변화를 일으키는 축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는 작가이자 급진주의자로서의 부르심에서 보다 더 큰 부르심에 응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글과 행동, 모두가 실천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고통당하는 인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다. 죄, 은총, 구원 등이 우리의 삶과 역사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을 때 일간지 뉴스는 우리의 관심사 밖으로 밀려나고 추상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그녀는 여섯 권의 책과 무려 1천 5백 편에 이르는 기사와 수필과 비평을 썼는데, 그것은 단순히 책상머리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한가운데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나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부랑자들의 거리에서 살며, 전쟁과 불의에 항거하면서, 심지어 감옥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진지하게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응답한 결과였다. 도로시는 “글과 행동, 둘 다 실천입니다. 둘 다 세상에 대한 윤리적 반응에서 나온 한 인간의 응답입니다”하고 말했다.

도로시 데이가 창립한 ‘가톨릭일꾼’은 거듭해서 운동의 목적과 목표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개인과 사회 속에서 표현하고 그 안에 함축된 바를 깨닫는 데에 있다”고 했다. 도로시는 ‘육화’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우리 인성(人性)을 취하셨으나 우리가 사랑으로 이웃을 향해 돌아서지 않는 한 그분을 뵐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육화의 사랑은 그저 반짝 타오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굶주린 이들과 함께 빵을 나누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버림받고 박해받는 사람들 곁에 머물며 우리의 동료애를 넓혀가는 것을 말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교회로 합류하기 전까지 살아온 세월을 “하느님을 향한 길고 외로운 여행”(1897~1927)이라고 불렀다. 그는 어린 시절에 성경과 종교적 세계에 심취하였으나, 대학에 들어가서 특유의 세심한 관찰력과 독서를 통해 비참한 세계상에 눈을 뜨면서 “평화와 온유와 기쁨을 가르치는 종교와 모순되는” 자신을 둘러싼 어두운 정치적 상황에 직면하였다. 안온한 “종교는 무자비하게 잘라버려야 할 것”이라고 느끼면서 ‘종교는 사람들의 아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도로시 데이는 청년기의 대부분을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려 지내며 정치적 행동주의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직접적인 봉사에 헌신하였다. 그는 급진주의 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극작가들, 예술가들, 노동조합 파업자들, 평화주의자들, 여성 참정론자들과 교제하였다.

그는 뉴욕에서 길을 걷다가 노숙하는 실업자들의 몸에 발이 걸려 넘어졌고, 뉴욕 슬럼가 근처의 악취와 분비물은 그를 소름끼치게 했다. 판지 상자를 집 삼아 사는 이들은 병에 걸려 신음하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 자신도 이따금 작은 봉급에 의지하며 빈약한 음식을 먹으며 온기가 없는 셋집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이 과정에서 불행한 애정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아이를 낳게 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입교할 것을 결심하게 됨으로써 ‘진보적인’ 그의 친구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친구들은 부와 권력의 교회로, 흔히 말하는 현상유지 세력인 보수적인 고위성직자들의 울타리로 그가 떠나버렸다고 생각했다. 도로시는 이러한 비난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교회 안에 문제가 많더라도 가난하고 착취당한 사람들의 교회야말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구세주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가난한 그리스도

▲도로시 데이
도로시 데이가 급진주의자가 된 것은 가난한 이들이 당해야 하는 고통 때문이었다. 그런데 복음을 대하면서 도로시는 하느님께서 몸소 가난한 이들 가운데 머물며 힘든 노동을 감당했으며, 그 시대의 지배자들에게 박해를 받고 노숙자들처럼 이슬을 맞으며 주무셨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비추어 성찰하였고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자신이 궁핍과 어려움에 처할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머리 둘 곳 없이 떠돌아다니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간의 아들은 머리 두실 데가 없으시다.’ 우리 삶의 불확실함과 불안함을 느낄 때면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영광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도들이 바닷가에서 끼니를 때웠으며 옥수수밭을 다니며 옥수수 자루를 따서 허기를 면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교회는 여전히 스캔들이었지만..

그리고 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은 교회였다. 도로시는 기성교회에 여전히 비판적이었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를 보이도록 만들어준 교회를 사랑했다. 교회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너무나 자주 나에게 스캔들이었다. 교회는 사업가 같은 사제들, [...] 공동체의 부유함, 가난한 사람, 노동자에 대한 책임 부족 [...] 심지어 이들에 대한 압제에 의해 스캔들이 되어 남아있다”고 말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세상에서 고유한 비전과 거룩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도로시는 제도교회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전통 안에서 본질적인 가능성을 이끌어냈다. 그는 안전을 위해 무기를 사용하고 권력과 소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단이요 신비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의 정체성을 되찾도록 촉구했다. 결국 교회가 자신의 예언자적 증언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도로시 데이는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평화의 중재자’라는 본래의 의미로 되돌려 놓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한편 도로시 데이는 성인이 되기를 갈망했는데,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성실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였다. 도로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으며, 성인이란 하느님을 일깨워준 이들이며, 자신의 삶을 통해 인간적 사랑의 영역을 넓히고 우리에게 따라오라 명령하는 이들의 행렬이라고 말한다. 또한 하느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랑에 빠져든 사람을 성인이라고 보았다.

그 숭고한 감정은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도록 이끈다. <유니온 광장에서 로마까지>라는 글에서, 도로시 데이는 “그분께서 고통과 죽음을 향해 내디딘 거룩한 걸음은 나의 일생을 되돌아 보게 한다”고 고백하였는데,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 홀로 겪으신 외로움과 두려움에 마음 아파하며, 우리 자신의 죄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 전 세계의 죄에 짓눌려 괴로워하셨던 그분 앞에 엎드려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그분께 동화(同化)된 사람들이며 그분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분의 신비체라는 것이다. (계속)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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