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2인조 가족ㅣ샤일라 오호ㅣ양철북(2009년)

샤일라 오호의 소설, <2인조 가족>은 구질구질한 궁핍의 이야기지만 책 속의 주인공들은 가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하나같이 활달하고 씩씩하고 꿋꿋하다. 주인공 야나는 예측불가의 괴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사춘기 소녀 야나는 남자친구와의 근사한 데이트를 상상하고 복권에라도 당첨되어 좋은 옷도 사고,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하고 꿈꾼다. 그러나 야나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스타일을 챙기기에는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아냐가 누군가. 가난 때문에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할 말도 못하는 소녀가 아니다. 할아버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한술 더 뜨신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 같다. 거짓말 9단에 사람들이 내다버리는 철학책에서 얻은 인문학적 지식도 보통은 아니다. 나잇살도 지긋하니 체면 같은 것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이 발랄한(?)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망측한 발언들은 망측하기 때문에 오히려 시적이다. 그 나이쯤 먹으면 무게를 잡아야 한다는 사회적 책무감도 없고, 체면치레 같은 것은 약에 쓸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손녀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 시대보다 몇 광년은 앞서가는 삶을 살고 있는 노인네다. (이 노인네의 작중 발언을 야곰야곰 음미해 보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큰 재미중의 하나다.)

왜 사냐는 아냐의 질문에 이 노인네는 답한다. “나는 화려하게 꾸며 입고, 인생에 만족하고, 배터지게 쳐먹고도 생각은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대안이 되어 주려고 살고 있어. 내가 두뇌가 되어 그런 무리 대신 생각을 해주는 거지.” 맞다. 이 노인네의 사는 방식은 우리네 뻔한 삶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먼저 이 노인네, 겁이 없다. 악착같이 벌어 조금이라도 비축해두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산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면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히는 우리네 태도를 이 노인네는 맘껏 비웃는다. 아마로 <마시멜로 이야기>를 들먹이며 현재의 주검 위에 미래의 공화국을 세우자는 덜떨어진 성장주의자에게 이 소설의 한 대목을 들려줘도 좋겠다. "고마워. 인생! 우리가 사는 공간에 정확하게 경계를 그려줘서!" 소설 속의 주인공이 가방에 심하게 정강이를 차이자 아마도 이런 순간에 할아버지는 아마도 이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상상한 내용이다. 현실의 불운 속에서도 우리는 아냐처럼 얼마든지 유용한 격언을 발명해낼 수 있다. 그 격언은 불우를 견딜 수 있는 포스와 유머를 만들어준다. 이 소설이 사랑스러운 이유다.

둘째, 솔직하다. 마음이 시키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한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거짓말도 사양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분증의 출생년도를 1799년으로 위조해놓고, 경찰에게도 자신이 실제로 1799년이라고 부득부득 우긴다. 미칠 일은 옆에서 그녀의 손녀 아냐까지 가세해 같이 우긴다는 거다. (세상은 인민들에게 상식을 요구하지만 세상에는 반드시 이런 무뎁뽀 인민들이 한 둘이 있어주어서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귀여운 몰상식 만세! 한번 놀아보자는 유희정신으로 똘똘 뭉쳐 자본주의의 성장 이데올로기에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그 불온한 상상력 만세!)

셋째, 이 노인네가 원하는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다. 자유로운 삶이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고 자고 싶으면 자는 삶이지, 누가 자란다고 해서 자는 삶이 아니다. 따로 정해져 있는 취침시간에 잠드는 그런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은 양로원에서는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이 노인네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그는 양로원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엘 가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운다. 그리고 판사들을 위해 멋진 일장연설까지 준비한다. 상식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멋지게 한방 먹일 태세다. (독자들은 이 노인네가 상식의 세계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한방을 먹이느냐에 끊임없이 주목하게 된다.)

어떻든 이 노인네는 자본주의의 생산원칙이 강요하는 방식에 고분고분할 마음이 애시당초 없다. 그는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라는 원칙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애초부터 다르게 살아보기로 아주 작정을 한 노인이다. (이 노인네가 젊어서도 이런 삶의 원칙을 고수했는지는 의문이다. 설령 이 노인네가 젊어서는 체제에 고분고분했다 할지라도 늙어서라도 이런 변칙의 삶을 산다고 해서 주착이니 어쩌니 토를 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늙어서라도 제 의지와 원칙대로 살기란 어디 쉬운 일인가. 박수를 보낼 일이지 비난을 보낼 일이 아니다.)

넷째, 이 노인네 말빨이 장난이 아니다. 그의 말빨은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쓰레기 철학책에서 얻은 오랜 내공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그의 발언에 철학적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예리한 직관, 시적인 통찰이 있다. 자기가 얼마나 슬퍼 보이냐는 손녀의 질문에 이 노인네는 답한다. “네가 슬픈 건, 멍청한 송아지이기 때문이야. 송아지들은 눈이 슬프거든” 슬픔은 생활의 조건 같은 것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아예 한편의 시를 쓰고 있다.

이 노인네와 아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러나 꼭 피가 섞여야 가족이라는 것은 아주 편협하고 옹색한 가족주의다. 가족은 서로 품고 이해하는 나눔과 공감의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아냐와 할아버지는 훌륭한 ‘2인조 가족’이다. 피는 한 방울도 섞지 않았지만 노인의 기질은 그대로 아냐에게 유전된다. 가난에도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꼿꼿이 들 수 있는 정신, 바로 그것이 사람을 하늘로 여기는 인문정신이 아닌가. 그것은 또한 어지간한 삶의 비극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거운 삶을 공중에 살짝 띄워보겠다는 유머정신이기도 하다. 유머정신이란 현실의 질서를 뒤틀어보겠다는 반역의 정신과도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가 바로 아냐다. 똑똑하고 건방지지만 꽤나 사색적이고 문학적이다. 게다가 살짝 염치가 없기까지 하다. 자신의 체스선생이 그녀를 초대해 약간의 과잉 제스쳐(?)를 보이자 아냐는 그를 밀치고 집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런 정신없는 비극의 와중에서도 생의 식탁에서 닭고기를 낚아내어 빼어나올 수 있는 담대함이 아냐에겐 있다. 아냐는 그런 점에서 얼빠진 정신주의자가 아니다.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 배고픔의 실체가 뭔지를 똑똑하게 아는 아이다. 그런 아이의 내면, 그런 아이의 유머, 그런 아이의 사랑을 들여다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다 쓰러져 가는 임대주택의 지하에 살면서도 자신의 집을 “우리 집은 엄청나게 넓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우리 집은 세계사에 존재했던 모든 중요한 건축물의 특징을 조금씩은 다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집은 콜로세움만큼이나 오래 되었고, 베니스와 제노바 공화국 총독 관저처럼 천장이 높고, 발할라 궁전만큼이나 황량하고, 도시 변두리와 주택가처럼 황폐하고 왕의 무덤처럼 서늘하고 음침했다.”라고 묘사할 수 있는 여유는 칭찬해줄 만하다.

대체 이런 여유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최소한의 의식주와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유럽식 사회보장제도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든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가난을 궁상맞게 연출하지 않아서 좋다. 가난해도 철학을 알고 시를 알고 웃음을 안다. 인간이 부릴 수 있는 모든 여유를 부릴 줄 안다. 심지어는 양로원에서조차 아냐의 할아버지는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는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내가 실없는 소리를 잘 하잖아요. 내가 죽긴 왜 죽어요? 정신은 어디에서든 자유로워요. 그리고 여기는 때 되면 어김없이 밥이 나오고요.” 비럭질을 해먹어도 할 말이 있다는, 그 모습이 참으로 늠름하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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