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학을 말한다-6]

▲대학이 취업 전쟁을 준비하는 곳인가? (사진/이광수)


대학생의 취업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내용은 현재의 취업, 일자리 나누기 등의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가 주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듣기 좋은 내용과 희망적인 얘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현재의 대학생들이 가장 크게 당면하고 있는 이야기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을 대표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기회라 생각이 들어 주변의 지인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취업이란 무엇일까?’, ‘대학생에게 취업이란 어떠한 것일까?’라는 질문의 답문은 충격적이었다. 후배도 있었고, 선배도, 친구들도 있었다. 20살도 있었고, 28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두려움, 막막함, 전쟁 등 하나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웠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답문이 있다. ‘꿈’ 만 같다. 이제는 아무리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깨지기만 할 꿈, 그 친구는 작년에 졸업했던 친구였다.

2009년 20대는 심장이 없다.

‘아프다고 말하면 정말 아플 것 같아서, 슬프다고 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냥 웃지’ 2009년 봄날을 강타했던 유행가의 가사다. 2009년의 20대의 모습,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고, 이번에는 혹시나 하며 웃어보지만, 자신은 아니라곤 하지만, 결국 체념하고 다시 웃기를 반복하는, 마치 우리 대학생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올해 초부터 등록금과 청년실업으로 인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대학생들의 언론보도가 빈번해졌다.

소위 일류대학으로 불리는 고려대학교에 들어가 휴학과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자기 인생에 좌절하여 한강에 몸을 던진 학생, 어렵게 모은 등록금 수 백만원을 보이스 피싱 사기로 날려버리고 15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썼고, 성매매로 이어져 부녀지간 모두가 목숨을 끊는 이야기까지. 2009년 몇 명의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곧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2004년에 대학에 들어와 4학년이 되어버린 나는 심심찮게 주변의 소식을 듣는다. 같이 대학에 들어왔던 여자동기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한 친구는 하루에 3-4개의 입사원서를 쓴다고 한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던 그 친구의 취업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제는 웃으면서 얘기한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회사가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왔던 한 친구는 결국 영어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이 친구는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외국으로 나갈 거라고 한다. 이 땅에서는 어쩐지 미래가 없어 보인다고 한다. 또 한 친구는 중소기업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학자금 대출이 있어, 이자 갚고 나면 남는게 없다고 한다. 2년 정도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냥 웃는다. 재학생 후배들이나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한번은 취업이 뭘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4학년 친구들은 ‘꿈’ 이라고 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잡으려고 발버둥 치면 깨어버릴 것만 같은 ‘꿈’ 이란다.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전쟁, 두려움 취업이야기가 나오면 모두들 한숨부터 쉬는 게 요즘 대학생이다. 이 친구들은 과연 어떤 대학생들인가? 막연히 먹고 놀던 소위 ‘먹고 대학생’이었던 것일까? 앞에 언급된 친구들은 소위 취업에 필수 조건인 ‘스펙’이 갖춰진 친구들이다. 토익 900점, 해외 어학연수, 해외 봉사활동, 공모전 수상, 인턴경력 등 언론에서 떠드는 경력을 갖춘 친구들이다.

2009년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취업의 전쟁터이다. 정부에서는 연일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허울만 좋은 인턴과 일용직밖에 없다. ‘이거라도 없으면 안 된다.’, ‘눈을 낮춰서 나가라’ 라는 등 동의할 수 없는 말만 쏟아 내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배움을 실현하고 나아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게 곧 노동이며,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단순히 자본의 논리로만 해결책을 찾는데서, 현재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현재를 바라보면 자본의 논리에 순응하게 된 대학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 12년 간 제도권 교육 하에 지속적인 주입식 교육과 경쟁을 배운 우리들은 대학에 와서 또 다른 경쟁에 부딪히게 된다. 학점에 치이고, 토익 뿐 아니라 봉사활동, 그것도 우리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하는 것이 아닌 기업 차원에서 운영하는 해외봉사 활동이 필요하다.

대학에서 우리는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키워나가야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물을 채우는 법만 배우고 있다. 그릇이 커야 담는 물의 양이 늘어나는데, 우리의 그릇은 한계가 있다. 많은 수업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보다 영어단어 하나, 마케팅 용어 하나 더 가르치는데 치중하고 있다. 우리의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관에 맞게 행동하게 만드는 게 아닌 졸업 후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데 치중하고 있다.

꿈꾸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생!

사람들은 항상 과거에서 후회하고 미래를 꿈꾸며 살아간다. 무언가를 꿈꾸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로만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은 애석하게도 꿈꾸지 못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만으로 현재를 살아가기에 급급하다. 우리는 꿈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누군가가 듣게 되면 참으로 바보같다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대학에서는 꿈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꿈을 꾸면 바보같다고 어리석다고 막는 것이 대학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항상 취업을 생각하고 4년 내내 토익과 학점에 매달리며 살아간다. 인생에서 도움이 되고, 공부하고 책을 읽는 행위보다는 조금 더 학점 따기 쉬운 수업을 들어 최대한 교수들에게 더 높은 학점을 따기 위해 노력한다. 일부 전문과를 제외하고 자신의 공부했던 전공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이다.

나는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창업에 대한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막연한 도전이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돈이 되는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더 더욱 공부를 하게 된 후, 기업가 정신을 알게 되었다. 일자리를 만들고 나누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 그것이 내가 해야한다 것도 알았다. 배움을 통해 꿈을 꾸고 단지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만들어가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대학은 아닐까?

혼자서는 너무나도 힘들기에 선생님들이 있고,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람들과 소통하여 마침내는 이루어내는 일련의 방법을 학교에서는 알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학교에서는 낙오자라 손가락질 한다. 이런 한가지 한가지들이 모여서 역동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할 지성의 상아탑을 종속적으로 만든 것은 아닌가? 이렇게 수동적이고 형편없는 인간이 된 우리를 만든 주체는 어디에 있을까?

대학생이 바라보는 대학이란 무엇인가?

과연 대학이란 곳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대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무엇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고, 어떤 배경에서 지금의 대학이 성립하게 되었을까? 학문의 자유와 교수들을 위해 자유로이 길드적으로 형성되었던 유럽과 달리 이 땅에서의 대학은 학문적 관심과 달리 정치적 관심에서 설립 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 민간주도의 자생적 요구의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던 민립대학운동은 실패하고, 식민 지배의 방편으로 또한 명목적으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국대학이었다. 해방 이후 박정희 독재정권, 전두환 군사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정치적 관심이 이 땅의 대학의 본질과 이념을 지배해왔다. 다시 말해서 대학의 주된 구성원들은 한 번도 주체적으로 서 본적이 없었다. 타자의 논리와 외부의 폭력이 대학의 자율권을 훼손하고, 이러한 정치적 볼모로 잡힌 대학 교육은 자연스레 황폐화되고, 대학의 이념과 본질, 그 사명감을 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중 하나가 대학강사의 문제다. 대학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들을 대학 강사로 내몰아 교원 지위도 주지 않은 채 지성의 전당을 운영한다. 힘의 논리로 비판적인 사고방식과 목소리를 잠재우고 마침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가치관도 사고의 방법도 모르는 우리는 한마디로 바보다. 대학에서의 4년간의 교육은 초, 중, 고 12년이나 유치원에서 배우는 교육만 못하다. 자격도 없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다 보면 생각이나 행동 모두 죽기 마련이다.

2008년의 우리 사회에서의 가장 큰 화두는 ‘촛불’ 이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촛불을 들었던 사람이 없다. 언젠가부터 내가 촛불을 얘기하면 속 편한 자식의 투정으로 받아들인다. 열심히 논쟁을 벌이면 결국 사람들은 ‘취직이 어려우니 토익을 보고 학점 관리하다보면 그런 것은 신경 쓸 틀이 없다.’ 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언젠가부터 대학생들은 개인의 문제만 생각하지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만 잘한다면 잘 살 수 있고, 이 사회의 주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인건 알지만 나는 아닐 것이다. 이게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는 통념이다.

부모님들은 우리가 대학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기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 것까진 아니더라도 이 사회에서 막연하게 한 역할을 해낼 거라고 본다. 그래서 초, 중, 고 과정에서 우리의 교육에 열성적이었던 많은 부모님들은 대학에 자신들의 자녀들의 미래를 맡긴다. 그것도 무한한 신뢰로써 대학에 위임한다.

그러나 정작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언젠가 한번 타 대학 학생의 글에서 ‘나는 가짜 대학생이길 거부 한다.’ 라는 글귀를 본 적 있다. 나 역시도 처음에 ‘진리의 상아탑’ 대학의 문턱에 들어왔을 때 많은 좌절을 느꼈다. 영어 수업은 고등학교와 학원만 못하고, 다른 많은 수업들도 같았다. 교수라는 사람들은 농담이나 던지며 우리를 즐겁게 할 줄만 알았지 진정한 배움을 전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에 화두였던 ‘최고 권력자의 탄핵’에 대하여 그 어떤 진지한 가르침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그렇다. 나 역시도 그렇고 세상을 알고 보는 눈이 없다. 제도권 교육 하에서 12년간 배우고 여기 대학에서 또 다시 우리는 외운다.

하루 종일 마케팅 분석기법의 이름을 외우고, 토익 영어단어를 외우고 문제 푸는 법을 배운다. 그렇지만 우리들 중 뛰어난 마케팅 기법을 개발하고,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외국인들과 자유로이 소통을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단지 외우기만 한다.

원인은 무엇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얘기해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 대학 교육의 60%를 차지하는 시간강사들은 말할 수 없다. 이유는 그들의 신분 불안이 우리의 소중한 강의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를 들어 전공 수업 중 경영전략을 얘기할 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또한 현실 쟁점에서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현 체제상의 모순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결국 그러한 신분의 불안은 자본과 기득권층에 있어서 일방적 주장을 학생들에게 다시금 주입하여 수동적인 인간을 양산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 수동적인 인간이 양산됨으로써 사회적인 현상에 능동적이고 다각화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모습에서도 여러 가지 현실 문제에 다각화된 관점의 사고가 아니 의존적이고 편향적인 사고로 해결함으로써, 사회적인 비효율뿐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목숨을 끊는 현상이 빈번해 진다.

강의실에서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문제가 이 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할 20대들을 다 죽이고 있다. 조금만 생각 구조의 틀을 바꿔보면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을 통해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어, 다각화된 방면의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야말로 진리의 전당 대학에서 그릇을 최대한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다. 지금의 취업난, 높은 자살빈도 모두 근본적 인과관계를 따져본다면 20대의 대학생활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들이 가야할 방향과 이상 모두 자본과 기득권층에서 심어 놓아 버렸고, 그곳에 들지 못하면 우린 낙오자가 된다. 이 사이에서 우리 대학생 20대들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혼자여서 약한 것이다!

내가 어릴 적 하늘은 너무 멀리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하늘과 나의 공간을 메울 만큼 큰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하늘은 성큼 나에게 다가와 있었다. 너무나도 동경하던 하늘이었지만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커버린 만큼 꿈도 작아졌었다. 스무살이 되고, 대학에 들어오고 난 하늘을 날 수 있을 줄로만 알고 있었다. 조금 더 하늘에 가까워졌지만 날 수 있는 힘도 있지만, 학교에서나 어디서나 내가 날 수 있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그냥 날지 못하는 닭일 뿐이란다. 그래서 예전이 그립다. 닭이 될 줄 몰랐던 작았던 그때로, 그때에는 적어도 아주 커다란 꿈과 희망이 있었다. 나와 하늘 사이를 가득 메웠던 그것들이 그립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후회와 그리움을 추억할 때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고 행동해야 한다.혼자서 세상을 살기에는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우리는 혼자 싸워서 이기는 법만 지속적으로 배워간다. 교실이 새롭게 변해야 한다. 이제는 공존하여 상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학 속의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제대로 된 문제 인식과 해결을 공유하는 것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이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서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조한일(고려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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