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26]

무엇이 새로운가 

그리스도교인들이 거의 무의식중에 착각하곤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교인이었다거나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정말 착각이다. 예수는 혈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유대교적 정신에 충실하고자 했던 유대교인이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는 의도도 없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이 유대교와 차별적인 예수만의 독자성을 강조하곤 하지만, 예수는 유대교적 전승을 공유하던 신실한 유대교인이었고, 율법교사, 즉 랍비였다. 

이런 그의 유대교적 정서는 자신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 없애러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태 5,17)고 말한 데서 잘 드러난다. 예수는 유대교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사진/한상봉
예수 정신을 잘 요약하고 있다는 사랑의 이중 계명 관련 증언,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7-40; 마르 12,28-34)도 예수 고유의 것이었다기보다는, 히브리 성서(신명기 6,5; 레위기 19,18)와 다양한 외경들 및 여러 랍비들의 가르침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문장이었다. 예수는 그저 자신이 아는 대로, 그리고 믿는 대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했을 뿐이다.

예수가 유대교 율법과 대립했던 증거로 자주 거론되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마르 2,27)이라는 말도 사실상 유대 랍비들 전통 안에 이미 전승되어 오던 해석적 지혜였다. 가령 출애굽기에 대한 유대교 랍비들의 해설서인 ‘메킬타’(31,13)에는 “안식일이 네게 맡겨져 있는 것이지 네가 안식일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탈출 20,8)는 말을 하느님의 계명으로 알고 그에 따르고자 했는데, 예수도 그 율법을, 특히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실했던 유대인 예수는 왜 유대교로부터 밀려나게 되었을까. 

형식이 아니라 내용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안식일을 지키고자 했지만, 예수에게 안식은 그저 아무 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건대 병든 이에게 안식은 치료이고, 굶주리는 이에게 안식은 한 끼 식사였다. 그렇다면 아무리 안식일이라도 굶주리는 이를 위해서는 밀가루를 구해 빵을 만들어 먹이는 노동을 해야 했다. 예수에게는 그것이 굶주리는 이를 위한 안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이러한 신축적 율법 해석과 실천은, 정말 긴급하지 않은 경우라면 환자 치료행위조차 금하는 방식으로 안식일법을 지키고자 했던 보수적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는 유대교적 관례와 문화에 친숙한 유대교인이었지만, 신의 구원의 가능성을 유대인에게만 제한하지도 않았다. 때로는 유대인보다 이방인에게 신의 구원이 먼저 임한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하느님은 당시 사회적 의인들 보다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보기도 했다. 그것이 율법의 정신이자 하느님의 사랑의 원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의 이런 태도는 이스라엘 밖 이방인의 구원을 상상해본 적 없던 보수적 유대인들의 관습과 정서를 자극했고, 죄인과 함께 어울리는 이도 죄인이라는 관례적 논리에 따라, 불경죄, 신성모독죄 등이 씌워졌고, 급기야 사형장으로까지 내몰리게 된 것이다. 죽인 이나 죽은 이나 나름대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 여전히 지속되는 종교사의 제일 큰 모순일 것이다. 

왜 보수는 사람을 죽일까 

이런 모순은 어디서 왜 생겨나는가. 그것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데서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해석과 실천의 기준을 외적 형식에서 찾는지, 내적 정신에서 찾는지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이 둘 가운데 선택하라면, 예수는 단연 내적 정신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러한 예수의 자세는 위에서 본대로 당시 전적으로 새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율법에 대해 신축적인 해석을 하던 바리사이들이라면 공유하던 자세이자 세계관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예수는 사실상 다른 유대교 종파들에 비해 바리사이파와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이라면 불행이랄까. 예수 당시 예수와 여러 차례 대립했던 바리사이파는 랍비 샴마이 계열의 보수파였다. 예나 이제나 보수주의자의 성향이 그렇듯이, 샴마이 계열의 바리사이파는 전통적 관습과 하늘의 율법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관례에 어긋난 언행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일은 적어도 그들에게는 당연한 처신이었다. 예수가 보수적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제대로 살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전승의 외적 형식을 중시하던 보수주의자가 주류일 때 그 안에서 무언가 내적 정신의 전승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때로는 목숨까지 담보해야 하는 위험한 가시밭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왜 여전히 그대로일까 

이런 배경 속에서 죽임당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생겨났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렇게 죽임당한 예수가 도리어 더 옳다고 따르는 이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그 예수의 정신을 구체화시키는 공동체여야 할 것이다. 마치 예수가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예수의 모습을 대신 살아주는 공동체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종교사의 아이러니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대단히 씁쓸하게도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의 정신보다는 예수를 죽인 보수적 바리사이의 관습과 논리를 더 따르고 그에 매인다.

오늘날 예수처럼 사는 이가 있다면 그이는 분명히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정죄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오늘 교회는 예수를 내어쫒은 보수적 유대교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일 예수가 한 언행 그대로 오늘도 따라하면 제 명에 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령 성서의 근본 정신상 하느님의 구원이 교회 안에만 갇혀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 대단히 불경한 발언인 냥 두 눈을 똥그랗게 뜨며 정죄하듯 공격적 표정을 짓는 이가 여전히 많다. 그런 표정을 보노라면 이천년 전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 꼭 그랬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표정까지 짓지는 않는다 해도 대부분의 그리스도교인이 교회 밖 구원을 내면에서까지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런 식으로 오늘도 그리스도교는 성서를, 예수의 정신을 자기중심적으로 오해한다. 예수를, 교리를 거의 무의식중에 이기적 욕망 충족의 수단처럼 착각하며 간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정말이지, 예수를 따른다면서, 예수를 믿는다면서, 예수가 한 그대로 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에서 몰아내는 그런 모순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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